겜구 2023. 10. 19. 18:43

"안녕, 게일. 오늘 하루는 어땠어?"
해 질 녘, 타브는 방금 봐온 장을 들고 어둠이 드리운 타워의 부엌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오늘은 사슴 스튜를 만들어야지. 마침 고기를 싸게 팔더라.
 
"안녕하세요! 저는 워터딥의 게일의 거울상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럭저럭이야? 아, 그나저나 시장에서 또 네 어머니랑 마주쳤어.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더라... 물론, 그 상황에서 가능한 만큼이겠지만..." 거울상의 활기차고 텅 빈 말에 아랑곳 않은 채 장 본 거리를 정리하며 타브는 말을 이어나갔다.
 
"죄송합니다. 방금 하신 말에 대한 대답은 제 데이터 베이스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도와드릴 게 있나요?"
 
"오늘도 네가 어딨는지 말 안 해줄 거야?" 
 
"죄송합니다. 방금 하신 말에 대한 대답은 제 데이터 베이스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도와드릴 게 있나요?"
정리를 끝낸 타브는 캐비닛 문을 닫으며 그제야 거울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세상을 구한 지 3개월 밖에 안 지났지만 그의 눈엔 300년짜리 지침이 서려있었다. 
 
"그래도 난 너를 꼭 찾을 거야, 게일."
 
너는 너의 인간됨을 포기하더라도,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피곤한 눈을 비비며 타브는 거울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에 손을 넣는 듯 약간의 빛의 너풀거림만 생길 뿐, 손은 그대로 형상을 통과했다.
 
"그럼 오늘은 네 어릴 적 이야기나 하나 해줄래?" 
 
"당연하죠! 이 이야기는 워터딥의 게일이 불과 7살일 때의 일화입니다..."
___
 
"너를 절대 잊지 않을게."
 
"뭐?"
 
추락할 때 머리를 부딪쳤나? 그렇다면 그게 타브였을까, 게일이었을까? 상기된 얼굴로 장황한 소리를 늘어놓는 그를 듣고 있던 타브의 얼굴은 처음엔 황당함으로, 그다음은 배신감으로, 마지막은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무슨 소리야, 게일. 우리 같이 하기로 했잖아, 뭐가 바뀐 거야?" 떨리는 목소리가 타브의 애써 차분하게 정돈된 표정을 배반했다. 게일은 타브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어느 먼 곳에 가 있었다.
 
"이런... 필멸에 속박된 관계로 내 주의를 분산시킬 순 없어. 왕관을 재련한 후, 신이 된 후에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그때 네가 원한다면 나의 선택받은 자가 되어도 좋고 말이야."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가는 게일의 뒷모습을 보며 타브는 몸이 얼어 쫓아가지도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불과 몇 시간 전에 나눴던 마지막 입맞춤의 온기가 아직 입술 위에서 춤추고 있는데, 너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왜 사랑한다는 말조차 한 번이라도 더 하고 가지 않아. 
 
난 네가 그저 행복해하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인데. 난, 아직-
___
 
타브가 게일을 다시 찾으러 나선건 세상을 구한 뒤 닷새 후였다. 그때까지 사흘은 술병에 빠져 보냈고, 하루는 숙취를 다스리는데 보냈으며, 나머지 하루는 아스타리온과 섀도 하트의 게일을 향한 친절한 암살 제안을 거절하며 보냈다 (고맙지만 우선 그를 찾고 너희들의... "제안"을 생각해 볼게, 그때까지는 좀 진정해 줄래? 그럼 자기야, 하지만 계획을 미리 세워놓는 건 항상 좋은 거야. 지금까지 우리가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운적이 있기나 해?).
 
저 넓은 지온타 깊이 가라앉은 고철 덩어리 몇 조각을 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하지만 상대는 워터딥의 게일이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 그가 아마 물속을 헤집고 있는 이 순간에, 나를 생각하기는 할까. 아니면 야망만을 그의 등대 삼아 그 깊고 검은 강을 거닐고 있나. 모든 걸 굴절시키는 물속에서, 제대로 앞이 보이기는 하는 걸까.
 
아무 소식도, 수확도 없이 그를 찾아 헤매던 타브는 열흘째 되던 날 워터딥으로 향했다. 그를 찾을 수 없다면, 기다리면 되겠지. 왕관을 건져 올린다 해도 다시 재건축할 곳은 필요할 테니 그의 그 유명한 타워만큼 적합한 곳은 없겠지.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의 타워는 생각보다도 더 찾기 쉬운 곳에 있었다. "워터딥의 게일" 이 헛소리는 아니었구나.
 
하지만 난 그냥 게일 데카리오스도 괜찮았을 건데.
 

타워 근처엔 예상했던 보호막이나 안전장치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평범했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니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혹시, 벌써 돌아온 건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마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홀의 끝에 선 게일의 뒷모습을 발견하자 타브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나올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게일?"
 
그러나 그가 뒤로 돌았을 땐 -
 
"안녕하세요! 저는 워터딥의 게일의 거울상입니다. 아하! 게일은 당신이 여기에 올 거라고 했어요. 아래의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더군요:"
 
 
아, 이 미친놈아.
 
 
"타브, 먼 길 찾아와 줘서 고마워.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저녁도 대접하고, 타라와 우리 어머니까지 인사시켜 줬을 텐데. 약속할게, 내가 신이 되면 그땐 더 성대한 만찬으로 대접하겠다고.
 
"나를 찾으려 한다는 건 들었어. 여기라면 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건데, 실망시켜서 미안해. 나는 아직 왕관을 찾고 있지만 분명 가까워지고 있어. 이걸 건저내면 내가 고칠 수 있을 거야. 네가 없는, 아주 먼 곳에서. 이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야. 그만큼 가장 큰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고 너는.. 너는 항상 내 주의를 끄는데 재능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제발 너를 향했던 내 사랑은 의심 말아줘.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은 내게 너무도 소중한 선물이었어. 선택받은 자에 대한 제안은 아직도 유효하니까, 그때 가서 다시 만나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줘.
 
"타브.. 나는 정말 대단해질 거야. 드디어 너에게도, 미스트라에게도 충분해질, 아니, 그보다 더 위대해질 어떤 존재가 되겠지. 난 세상을, 신들을 바꾸게 될 거야. 너도 아마 이 새로운 세계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이 탑과 거울상은 내가 필멸자로서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청소와 유지에 대해선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이건 아주 성능이 좋은 마법사의 탑이거든. 아, 심심할 땐 내 거울상이 꽤 재밌는 이야기들을 해줄 거야.

“그럼 잘 있어, 타브. 새로운 세계에서 보자"
 
"메시지가 끝났습니다. 다시 들으시겠습니까?"
 
진짜, 이럴 때까지도 빌어먹게 말이 많네, 타브는 헛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어찌하진 못했다.
 
했던. 
나를 향한 너의 사랑은 이제 영영 과거형인가. 고대의 불가해한 힘 앞에서, 나는 결국 필적하지 못한 걸까.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너 하나면 충분했는데. 네가 주문 하나 못 왼다 해도 좋아했을 건데. 내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짓는 너의 그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서 그걸 지워주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타브의 손길 아래 게일의 형상은 강에 비친 달빛처럼 어른거린다. 그는 그것을 쥐려 필사적으로 손짓하다 결국 무너진다. 
___
 
타브는 매일 아침 타워를 나서 게일을 찾아다녔고, 저녁엔 타워로 돌아와 게일의 분신과 일방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며, 밤엔 침대에서 붕괴되었다. 타워 구석구석 그의 연인의 흔적들은 (얼마나 많이 봤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책 등이 다 벗겨진 서적, 그의 환상 속에서 봤던 피아노, 타라는 없지만 여전히 매일 신선한 우유가 채워진 물그릇, 수도 없이 만지고 움켜쥐었던 그의 잠옷,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타브의 마음을 달래줄 때도, 어떨 때는 완전히 부숴버리기도 하였다. 
 
게일이 남기고 간 망한 거울상이 꼴도 보기 싫음에도, 어떤 때는 이것만 데리고 살면 어떨까 생각도 했다. 겉으로는 그와 완벽히 동일하고, 적당한 유머 감각도 갖추었으며, 레퍼토리 안에서만 있으면 꽤 괜찮은 대화상대 이기도 했다. 각도가 살짝 엇나가고 빛 아래에서 희미해지지만 이 정도 환상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하나 나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일부러 찾는 게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닐까 싶다가도, 1) 그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 무모한 짓을 하고 있고 2) 아직 못다 한 말이 있고 3) 정말 단순하게도, 그냥 그가 많이 보고 싶었으므로, 타브는 항상 마음을 다잡았다.
 
게일은 어떤 신이 될까. 그의 선한 마음은 필멸자들을 잘 보살필까, 아니면 그의 냉정할 정도로 이성적인 면이 그들을 외면할까.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걸 좋아하니 축복을 많이 베풀려나, 아니면 어떤 숭배자의 원망 섞인 눈빛이 보기 싫어 너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려나. 자신감이 넘치니 그 힘을 제 것인 양 다룰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만족을 못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 할까. 어디까지 올라갈까. 얼마나 추락할까. 추락했을 때 내가 건져내줄 수 있을까. 그걸 원하기는 할까. 
 
어떻게 그렇게 영리한 사람이 그렇게 멍청할 수 있는지. 
무엇을 더 증명하려 하는 거야? 
 
나를 선택받은 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건 사랑일까? 혹은 옛 연인에게 베푸는 은혜인지, 권력에 눈이 먼 헛소리인지, 아니면 미스트라가 네게 행한 비극을 그대로 물려주겠다는 건지. 미스트라가 네게 다가갔을 때도 자기의 행동이 정당하다 생각했을까. 아니면 신이 되면 그런 무심결 한 잔인함을 더 이상 인지하지 못하게 되나. 너도 그렇게 되려나. 이미 그런가.
 
시간이 부족했다.
___
 
"안녕 게일, 오늘은 기분이 어때?"
"안녕하세요! 저는 워터딥의 게일의 거울상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좋은 아침이야 게일. 너 혹시 예전에 캠프에서 해줬던 사슴 스튜 레시피 있어?"
"안녕하세요! 저는 워터딥의 게일의 거울상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녕 게일, 오늘 엄청나게 귀여운 고양이 봤다? 네가 엄청 좋아했을 거야. 물론 타라만큼은 아니겠지만.."
"안녕하세요! 저는 워터딥의 게일의 거울상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게일, 네가 내 마음을 스치는 만큼 나도 네 마음에 스칠까?"
"안녕하세요! 저는 워터딥의 게일의 거울상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게일! 오늘은 오랜만에 아스타리온을 만났어. 의외로 괜찮은 스폰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 물론 이 말을 해주니 화를 냈지만. 그가 그대로여서 다행이야, 그지?"
"안녕하세요! 저는 워터딥의 게일의 거울상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게일, 근황이 어때,
아직도 물속이야?
 
 
"안녕, 게일"
...
"타브. 오랜만이야"
___
 
워터딥의 게일
그 이름이 미스트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부터 게일은 6피트의 깊은 땅을 파고 게일 데카리오스를 죽여 직접 묻었다. 그가 묻힌 벌판을 물로 가득 채우고 그 누구도 다신 찾지 못하게 깊은 수심 아래로 가라앉혔다. 그 피와 뼈와 살 위에 워터딥의 게일이 다시 태어났다. 워터딥의 게일, 엘민스터의 뒤를 이을 마법사. 워터딥의 게일, 미스트라의 연인. 워터딥의 게일, 역사에 길이 남을 돌풍. 워터딥의 게일, 야망의 신. 자신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얼마나 황홀한 일인지.  
 
그리고 새로운 탄생 직전에 방해받는 건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보이지 않아? 나는 이제 승천할 준비가 다 되어있어. 정말 멋질 거야, 타브. 난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신이 될 거야. 모두가 날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겠지. 난 더 이상 고작 워터딥의 게일이 아니라, 야망의 신이 될 거야. 아,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말아 줘. 내가 행복해지는 게 보고 싶지 않아?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세계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너는 행복하지 않아? 
 
세상 끝의 어느 다 무너져가는 도서관 안에서 두 연인은 서로를 다시 마주한다. 육지임에도 공기가 무거운 게 대기 중의 무언가인지, 자신의 감정의 무게인지 타브는 알 수가 없다. 사랑스러운 아기를 안는 듯 왕관을 어루만지는 게일의 손은 조심스럽고 애정이 가득하다.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지만 타브는 유치하게도 그것에게 질투를 느낀다. 
 
"네 어머니가 안부 전해달라 하시더라." 왕관에서 애써 눈을 떼며 타브는 게일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의 눈을 마주치고 서 있는 게일의 얼굴은 읽을 수가 없다. 
 
분명 모든 걸 집어삼키는 오브는 게일의 가슴속에 있는데 왜 타들어가는 건 타브의 심장일까. 게일 데카리오스, 난 행복하지 않아. 너는 행복해? 난 두려워. 
 
죽은 자의 이름에 그가 반응한다. 
 
"그 바보 같은 소년은 보잘것없었어. 불완전했고, 초라했지. 이제 조금만 있으면 네 눈앞에서 나의 가장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나로부터 두려워할 건 없어." 언젠가 끊임없는 따스함을 담고 있었던 그의 갈색 눈은 차가운 열기만이 가득했다. 타브는 그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려 헤맨다.
 
"타라도 잘 지내고 있대. 근데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무릎 관절이 좀 약해졌다나 봐. 널 만나면 대신해서 잔소리 좀 해달라 하더라고." 심장이 다 타고난 자리엔 재밖에 남지 않아서, 깊게 숨을 쉬려 할 때마다 되려 숨이 막힌다. 게일은 대답대신 얼굴을 찌푸린다. 몇 달 새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진 듯 보였다. 
 
"타브, 여긴 왜 온 거야?" 그는 더 이상 말투에 서있는 날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엘민스터? 아니면 혹시 미스트라가 새로운 애완견을 찾았나? 그것도 아니면 다시 왕관을 되찾아 달라고 메피스토펠레스가 거래라도 걸어왔어? 그렇게 먼 길을 와놓고 지금에서야 나를 두려워하는 거야, 타브?" 
 
우스운 말이다. 신도, 악마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게 사랑인데, 이젠 그것도 잊은 건지. 물러설 곳이 없는 타브는 게일을 향해 거리를 좁히며 다가온다.

"난 네가 아니라 네가 지금 너 자신에게 할 짓이 두려운 거야. 난 그 누구의 사주도 받고 오지 않았어. 나는..." 타브는 이제 게일의 코 앞에 서있다.
 
"나는 그냥 게일 데카리오스가 보고 싶었어." 타브는 자신의 재킷 품 안으로 손을 짚어 넣는다. 설마, 게일은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움켜쥔다.
 
"그리고 나도 그 이름을 공유하길 원했어." 
 
보석하나 박히지 않은, 누군가는 초라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깔끔한 반지 두 개가 타브의 품 안에서 나온다. 
____
 
워터딥의 게일
 
무한한 목소리로 미스트라가 게일을 부른다. 바다만큼 거대한 손바닥 안에서 익사하며 게일은 그의 신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당신은 왜 나를 내 이름으로 부르지 않나요?
 
그의 신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을 뿐이다.
__
 
카서스의 연보 전에는 
긴 하루 끝에 여관으로 돌아와 벽난로 앞에서 같이 와인이나 마시던 동료들이 있었고, 너를 모레나에게 소개해줄 거라는 희망이 있었고, 마법 한가닥 없이 서로의 몸 하나만으로 보냈던 밤들이 있었고, 도시의 딱딱한 돌바닥도 자연의 혼돈스러운 풀숲도 함께 거닐면 아름답다고 일깨워준 네가 있었고, 반지는 어떤 걸 할까 고민하던 내가 있었고, 
 
왕관을 마주하기 전에는
차원의 경계에서 죽어가던 나를 세상으로 이끌어준 손이 있었고, 캠프에서 다 같이 해 먹던 저녁이 있었고, 해가 뜨기 시작할 때 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을 보며 감탄하던 순간들이 있었고, 수줍고 어색하던 첫 키스가 있었고, 무한히 아름다운 환상을 마다하고 그냥 나를 안아줬던 네가 있었고,
 
그 모든 게 일어나기 전에는
마법을 좋아하던 어린 소년이 있었고, 그 외로운 소년의 친구였던 트레심이 있었고, 길거리에서 항상 맡을 수 있던 갓 구운 빵 냄새가 있었고, 너무 깊은 물에 들어가 가라앉지 않도록 잡아준 사람들이 있었고, 세상을 손에 쥐기보다는 그저 보고 싶었던 게일 데카리오스가 있었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아니, 게일은 제 마음만큼이나 흔들리는 숨을 다듬으려 노력한다, 난 지금 너무 가까워. 여기서 포기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어. 이것만 있으면 모든 걸 바꿀 수 있는데. 신들에게도, 너에게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줄 텐데, 내 가치를 볼 수 있을 텐데. 어떤 실수도 만회할 수 있고, 그 누구도 나에게 감히 실망 따위 못하고, 난 드디어 만족이 뭔지 알 수 있을 텐데.
 
"타브... 이.. 청혼..으로 나를 설득할 거라고 믿은 거야? 설마-" 
 
"게일, " 타브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한다. 분명 게일이 왕관을 다듬으며 보냈던 그 수많은 밤마다 떠올렸던 것만큼 가볍고 밝은 소리여야 할 텐데, 울음이 섞여 물 안에서 숨을 쉬려 하는 것 같은 젖은 소리가 난다.
 
"난 네 장례를 준비하기 싫어."
 
"뭐?"
 
세상에서 제일 슬픈 눈으로 타브는 게일을 바라본다.

"나는 신의 행세를 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필멸자인 워터딥 출신의 게일 데카리오스와 사랑에 빠졌으니까. 그와의 결혼식을 바랐는데, 그가 없어진다면 대신 장례를 치러야지.

“누군가는 그가 떠나간 자리에 꽃을 놓고, 그와 함께한 기억을 읊고, 애도를 해야지. 항상 충분했던, 항상 사랑받아 마땅했던 그이를 위해 누군가는 그 자리를 지켜야지. 묘비를 세우고, 근처에 난 잡초 정리를 하고, 슬픈 발라드를 연주할 거야. 누군가는 그리움에 사무쳐 너를 생각하며 날밤을 지새워야 할거 아냐.”

게일은 이해할 수가 없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자신을 애도한 적은 없었다. 게일 데카리오스는 더 위대한 무언가의 탄생을 위해 필요했던 희생이었고, 그 누구도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우선 자신부터 그랬다. 그 순진했던 소년이 뭐라고, 그저 사랑과 인정이 고픈 여느 어린 마법사였던 그는 특별하지 않았어. 그냥 기억에서 잊히면 다행이지, 아마 그는 모두를 실망시켰을 거야. 그의 모든 부분을 토해내서 묻어버리고 잊어버리려 했는데, 너는 날 그때 만난 것도 아니면서 어쩜 내게서 그를 그리 잘 읽어내는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사랑하는지, 왜 그를 애도하는지.

워터딥의 게일은 아름답지만 얇은 유리 집에 살았다. 유리 너머로 빛이 들어오고 나갈 때 아름다운 프리즘을 비추지만, 결국은 굴절된 진심이다. 대부분은 그 찬란한 무지개에 주의를 빼앗겨 이게 인정이고, 권력이고, 사랑이라 말했다. 자신도 그리 믿었다. 하지만 타브는 항상 그 너머 자신을 본다. 신이 된 게일은 그것보다 훨씬 더 높고, 화려하고, 미풍에도 흔들릴 유리 성안에 살 것이다.

그럼 게일 데카리오스는?

"네가 맞아 게일,“ 타브는 울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난 널 멈출 수 없어. 그럴 권리도, 권력도 없지. 난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원했어. 그 옆에 나도 같이 있을 수 있길 바랐지. 하지만 만약 이게 네 마지막 소원이라면, 이렇게 해서 행복해진다면, 그래서 네가 죽고 신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내 사랑을 애도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러니 다시 물을게: 게일, 넌 지금 행복해?

넌 지금 행복해지려 달려가는 거야, 아니면 실망을 피해 달아나는 거야? 
__

원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두려운 것을 피해 달아나는 건 사실 약지와 중지만큼 가까이 닿아 있는 것이라, 물속에 잠기면 꺾여 둘을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보이기에 그렇다 해서 진짜 그런 것은 아니라, 물 밖으로만 나오면 다시 제대로 제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나와야 한다, 물 밖이 두려워도. 물 안이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해도. 두려움의 부재는 행복이 아니라서, 행복하다 해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렵다 해서 해서 행복해질 수 없는 것도 아니니.
___
 
늦은 밤, 두 명의 필멸자가 도서관을 떠난다. 그들의 손에는 그 어떤 비밀도, 눈속임도 없는 단순한 반지가 끼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