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구 2023. 10. 16. 15:40

"있잖아, 혹시 후회한 적 있어?"
서로에게 엉켜 평화롭게 늘어져 있는 게일의 탑의 고요한 어둠 안, 타브가 침묵을 깬다. 주어가 없어도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게일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왕관. 권력. 신성.
"그럴 리가, " 그는 부드럽게 거짓말을 한다, "네가 여기 있는걸."

후회해, 네가 보고 있지 않을 때. 손짓 한 번으로 성은커녕 나 하나도 겨우 들어 올릴 때. 예전 동료들이 나를 보며 아는 채도 하지 않을 때. 미스트라의 시선이 더 이상 내게 닿지 않는다는 걸 느낄ㄸ- 

 



워터딥에 드디어 다시 도착했을 때 게일은 그의 생각만큼, 그리고 타브의 상상보다 더, 환영받았다. "불명예스럽게 떠난 미스트라의 전 쵸슨,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으로 돌아오다-!" 게다가 곁에는 그의 새로운 사랑과 함께였으니, 누가 봐도 완벽한 귀환이 아닐 수 없었다. 성대한 환영, 찬란한 결혼식, 그 후 끊임없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결혼생활까지. 인생에 만족하기 위해 뭐가 더 필요할까. 

물론, 게일은 항상 무언가에 만족하는 것에 대해선 재능이 없었다는 게 문제지만. 



인생은 이름 따라간다고, 그의 어머니는 고심 끝에 그에게 게일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때, 그는 정말로 그게 사실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의 이름처럼 그는 모든 영역과 차원에 들이칠 아름답고 압도적인 폭풍이 될 거라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강력해질 거라고. 그러나 지금처럼 그의 워터딥 타워에서 일어나 시시한 아침을 맞이할 때면, 게일은 자신이 지금까지 겨우 미풍이기는 했었나,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생 내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두의 인정을 받는 건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쉬운 일이었나? 아니면 그만큼 자신을 몰아쳤었나?), 심지어 의 인정을 받는 것도. 게일은 위브를 공기처럼 들이마시고 마법을 제 몸의 일부인 듯 다뤘다. 위브를 형성하고 조작하는 것은 걷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고, 대부분은 본능인 듯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 모든 찬사와 인정들은 참으로 도취적이었고, 반대로 어쩌다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건 내색하진 않아도 마음속엔 사형선고로 다가왔다. 그는 신과 사랑을 나눴지만 그보다도 미스트라가 그에 대한 (그의 마법에 대한) 포용을 보여줬을 때 그 어떤 육체적 행위보다 한없이 더 한 황홀감을 느꼈다. 이 모든 게 그를 중독시키기에 충분했으니, 결국 게일은 살기 위해 인정이, 찬사가, 사랑이 필요했다. 참 영리했지,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하면 더 사랑받을지, 잘 살아남을지를 배웠으니. 그저 더 많이, 더 잘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마법으로 그의 전체 존재를 정의하고 그의 삶의 모든 부분을 위브로 채워 넣기만 하면 그는 끝없는 사랑의, 수용, 인정, 모든 것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찬 날들로 보상을 받았다.

이제는 간신히 기어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구나, 게일은 멍한 표정으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돌아보면 그때 약속받았던 것들 중 어느 게 진실인지, 어느 게 그저 신의 변덕인지, 게일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존경받는 위저드였다; 오브는 그의 타고난 지성도, 스스로 쌓아 올린 업적도 빼앗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이제 진정한 왕국의 영웅이었으며 그에 마땅한 칭송을 받기도 했다. 타브와 함께 하는 그의 탑에서 삶은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게일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행복해야 했다. 그는 행복했다. 만족했다.

 

 

타브에게 청혼할 때, 그는 더 이상 워터딥의 게일이 아닌, 그저 게일 데카리오스라고 자신을 새로 소개했다. 좋은 날에는 그걸 정말로 믿었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

(그는 그날 하루에 열 번째로 주문이 헛되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예전 동료들 옆을 지나갈 때 그들의 수군거림을 눈치챈다. 또다시 어머니가 방문해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한다 - "게일, 그냥 잘 있나 확인하려고...")


"게일, 또 그 표정이네. 그 스펠이 네가 좋아하는 셔츠를 태워먹기라도 했어?" 게일은 헛된 시도를 외면하고 두 잔의 차를 들고 문간에 서 있는 타브와 마주했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에 그날 처음으로 편안함이 가득 차올랐다. 

"아직은 아니지만, 계속 실패하면 내가 내 셔츠를 먹어 버릴걸." 유한 말투지만 그 밑에 서려있는 씁쓸함은 숨길 수 없었다. 예전엔 참 쉬웠는데. 이것과 다른 몇 백 개의 주문을 당연한 듯, 숨 쉬듯 부릴 수 있었는데. 타브는 게일의 눈에 드리운 슬픔을 읽어내고는 (그는 항상 그랬다) 그의 몸에 부드럽게 팔을 감았다. 게일의 어깨와 목의 뻣뻣함이 옷 위로도 확연히 느껴졌다. 최근엔 거의 항상 그런 식이었다. 

"실패가 아니라, 연습 중인 거야. 배우는 중이라고! 다시 돌아올 거야, 악기 연주를 다시 하는 것처럼 말이지. 예전이랑 똑같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무언가가 될 수 도 있잖아. 꽤 멋지지 않아?"

게일은 타브의 손길에 참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숨을 내쉬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의 연인의 말을 믿을 수 있기를 원했다. 


(오브가 빼앗아간 그의 능력을, 재능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게일은 가끔 오브가 마법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듯, 자신도 오브를 으깨고 흡수하는 꿈을 꿨다. 그게 자신의 구석구석을 채워, 그의 힘, 지위, 자부심,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아름답고, 파괴적인 꿈. 다른 때는, 오브가 그를 완전히 집어삼켜버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설령 그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세상은 그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니.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상태라면 그의 부재가 세상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미스트라가 고작 손짓 한 번으로 오브를 드디어 꺼내었을 때 (지금까지, 이걸 내내 할 수 있었다고? 나를 돕고, 나를 다시 데려가고, 나를 구할 수도 -) 안도와 기쁨 직후 상실이 그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오브가 삼킨 모든 것 - 그의 시간, 감정, 재능 - 은 이제 정말로 사라졌다. 이제 게일은 더 위로, 더 나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약속의 기회를 결코 되찾을 수 없다. 워터딥의 게일이 진정으로, 완벽하게 죽은 순간이었다.



("타브, 알잖아, 널 사랑하는걸.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어. 이건 우리 둘을 위한 거야. 만약 내가 신이 된다면..."
"음. 사실 나는 네가 날 위해 살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필멸자로서. 내 곁에서.") 

게일은 타브를 사랑한다 (게일은 그를 저주했다). 게일은 타브를 사랑한다 (게일은 그를 원망했다). 게일은 타브를 사랑한다 (게일은 그를...). 


"타브, 그건 이미 마법을 사용해 -"

"게일, 만약 실제로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을 거라면 이걸 가지고 있는 게 뭔 의미가 있어?" 게일의 손에 피아노는 이젠 완전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직접 이걸 연주했을 때가 언제더라. 지금 다시 시도한다면 분명히 비참하게 실패할게 뻔하다. 타브는 그의 불안을 읽어내고 (그는 항상 그랬다)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같이 하면 되지. 난 항상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었고, 오래 안 쳤다 해도 너는 좋은 선생님이니까. 어쨌든 누가 평가하는 사람도 없잖아?"

그건 그렇네. 누구도 채점하는 사람도, 평가하는 사람도, 적어도 지금 여기엔 없지. 괜히 코 끝이 찡해지는 걸 느끼며 게일은 타브의 옆에 앉아 시험 삼아 건반을 만져본다. 나쁘지 않네, 어쩌면. 


("나는 게일 데카리오스가 더 좋은 것 같은데."
"너는.. 내 너무나 많은 것을 좋아해, 내가 버리고 싶은 부분마저. 게일 데카리오스도 너를 좋아해. 정말로, 아주 많이.")

 

 

게일 데카리오스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의 재능을 부정할 순 없었으나 엘민스터가 그를 알아보고 미스트라가 그를 선택하기 전까지 그는 거리에서 지나쳐도 기억조차 못 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게일 데카리오스는 부족했고, 어쩌면 평생 그 무엇에도 충분치 못했을 수도 있다. 그는 워터딥의 게일이 태어나기 위해 죽어야 했던 필요한 희생이었다. 무엇보다, 미스트라는 그를 항상 워터딥의 게일이라고만 불렀으니. 아니, 사실 그 이름을 지어준 것도 였으니, 그 누가 자신의 신을 거역할 수 있을까.

아마 그게 문제였을까. 어쩌면 게일은 를 거절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실제로 미스트라를 거절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 소년은 여전히 자신의 방식으로 살고 성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애초에 처음부터 그에게 대가 없이 주어지지 않았던 모든 것들 - 찬사, 인정, 포용 - 을 좇지는 않았을지도.

게일 데카리오스가 죽은 자리에서 태어난 워터딥의 게일은 무시될 수 없는 존재였다. 강력하고, 웅장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 그럴 근거도 충분했고. 그는 생각만으로 성을 움직일 수도 있었고, 단지 같이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기 위해 (그리고 그걸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른 차원의 존재들을 소환했다. 그는 신과 사랑을 나누었고, 를 기쁘게 했고, 를 만족시키려 했다. 워터딥의 게일은 실제로 충분해질 기회가, 가치 있어질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드디어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


"왕관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너 대신에 라는, 소리 내 말하지 않은 말이 방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타브의 얼굴에 퍼진 충격을 보고 게일은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당황은 죄책감으로, 죄책감은 마침내 원망으로 변했다.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아, 하지만 진심인걸, " 게일은 필사적으로 그의 양심을 밀어내고 일부러 독에 절여진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가게 내버려 두었다. 작고 한심하게 보일 바엔 잔인하게 보이는 게 나았다. 

"네가 나를 막지 않았다면, 나는 신이 될 수 있었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었을 거라고. 나는 우리를 보호하고, 누구도 감히 우릴 넘볼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 수 있었어. 완벽하게 충만한 불멸을 줄 수도, 우리만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수 도 있었을 거야. 근데 우리에게 남은 건 뭐지? 나는 내 과거의 메아리로 여기에 남겨졌어. 나는.. 마침내 충분해질 수 있었을 거야. 만족할 수 있었을 거야. 근데 네가 그걸 앗아 간 거야." 게일은 타브의 눈을 필사적으로 피하며 말했다.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아닌지 자신도 몰랐다. 

 

게일은 자신의 가슴속에 완전히 썩은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더 이상 오브가 아니었다. 

 

"게일, 넌 언제나 충분했어."

거짓말, 게일은 자신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어쩌다가 너는 내가 부족하지 않다고, 나만으로 괜찮다고 믿게 된 걸까. 어쩌다 나는 너를 속이게 되었나. 어쩌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믿게 된 걸까. 그게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아직도 모르는 걸까. 너는 내 힘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날 본 적이 없잖아. 그때 만났다면 참 많은 걸 다르게 했을 텐데. 더 많이, 더 잘했을 텐데. 너는 진정한 만족이 뭔지, 내 갈망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면서 - 

"내게서 위브와 마법을 빼면 뭐가 남지? 내 존재의 본질들-"


"빌어먹을, 게일, 네가 남잖아!"


지독한 사랑의 선언이다. 그리고 그 선언에 게일은 처참히 무너져 내린다.


나는 아직도 내 과거가, 내 능력이 없으면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너는 어쩜 그렇게 날 잘 안다고 생각하는지.


게일은 그의 연인만큼 그 어린 순진한 소년을 사랑할 수 있길 바랐다. 정말로, 진심으로 그랬다. 게일은 그 시절의 게일 데카리오스를 잊고 싶은 만큼 그리워했지만, 더 이상 그를 어떻게 찾을지, 만난다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에게 도망가라고, 힘과 신과 마법과 사랑과 상처 입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그에게 이번엔 더 잘하라고,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그 소년은 그저 충분하다고, 항상 충분했다고, 이만하면 만족해도 된다고 말하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려 주는걸 가장 원하지 않을까. 


(그날 밤, 게일은 타브의 품에 안겨 수백 개의 사과를 쏟아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더 나은 사람이 될게.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 그리고 타브는 그 말들 속에 담긴 모든 걸 읽어내고 (그는 항상 그랬다), 부드럽게 그를 다독인다. 너는 앞으로 나를 실망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나도 너를 실망시킬 수도 있고, 그것도 괜찮을 거야.

우린 필멸자들이잖아.)


게일 데카리오스는 서툰 인간이다. 그가 원한다면 여전히 자신감을 가질 수 있으며 - 그럴 이유야 충분하니까 - 종종 자만심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점점 균형을 맞추는 데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는 그의 마법을 남들을 가르칠 때, 높은 책장에 있는 책을 꺼낼 때, 그리고 제일 중요하게도, 타브의 차를 데우고 자신의 차를 식히기 위해 사용한다. 그는 피아노를 잘 못 치고, 실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말싸움에서 매번 자기가 옳아야만 하는 버릇도 고치고 있고 말이지. 그는 다른 어느 필멸자들처럼 사랑을 나눈다 (이건 그가 실제로 매우 즐기고 있는 부분이었다).

 

 

("침대에선 마법 금지라니까."
"하지만 -"
"말했잖아, 난 네가 날 감명시켜 주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널 원한다고.")

게일은 그 말을 믿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