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구 2023. 12. 14. 21:08

우리는 사랑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잠식하여 의식과 무의식에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고, 그림자만 봐도 알아볼 수 있으며, 거대한 군중 속에서도 그 체취를 읽어낼 수 있다.

여기에 대한 부작용이라 한다면, 그 사람이 - 그 사랑이 - 곁에 없을 때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색채로 뒤덮인 세상을 봐도 감흥이 없고 군중 속에 있어도 고독하다.

그래서 여덟 시가 막 넘어가고 있는 시각, 게일은 혼자 제 연인의 집에서 평소보다 더 지독한 정적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평소라면 두 시간 전에 벌써 퇴근했어야 하는데, 차가 밀리나, 아니면 아직 일이 남아있나. 아까 눈이 꽤 왔는데 도로는 괜찮을까... 연말이니 바쁠 시기는 맞지만, 그래도 생일인데...

생각이 거기에 도달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전화가 울렸다. 멍 하니 식어가는 음식을 보고 있던 게일은 깜짝 놀라 잠시 허둥거리다 겨우 핸드폰을 찾았다. 그는 발신자를 보고 얼굴을 피며 전화를 받았다.

“미스트라! 괜찮아요? 아까 눈이 와서 혹시 -“
 
”난 괜찮아 게일. 오늘 신문사 기자들이랑 저녁 먹어서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 원한다면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고.“

”아, 그래도 생일인데...”

“다음에 밥 먹자. 나중에 이야기해.“

21초의 통화 후, 말 한마디 더 끼워 넣을 틈 없이 냉정하게 전화는 끊겼다. 착잡한 얼굴로 스크린을 한동안 바라보던 게일은 포기한 듯 폰을 성의 없이 옆으로 던졌다. 그는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소파에 깊게 기대어 가라앉았다.

다음에

이 관계에서 참 많이 듣는 말이다. 다음은 없다는걸 알면서도, 항상 속는 말이기도 하다. 다음에. 나중에. 그건 좀 곤란해. 오늘은 좀 바빠. 기다려. 기다리지 마. 여기선 아는 척하지 말아 주겠니? 그냥 집에서 보자. 너도 주변에서 뭐라고 할지 알잖아. 네게 피해 갈까 봐 그러지.

이 모든 것 보다도 제일 익숙한 건 미스트라의 침묵이지만.

아침부터 제 애인의 생일이라고 일어나 장을 보고, 와인을 고르고, 그의 집에 도착해 반짝반짝 청소도 해 놓고, 쉴 틈도 없이 그의 퇴근시간에 맞춰 저녁준비까지 했는데 정작 그 주인공은 자리에 없다. 점심때 겨우 샌드위치 하나 먹은 게 다여서 뭔가를 먹긴 해야 하지만 게일은 전혀 밥맛이 없었다. 벌써 여덟 시 반인데, 얼마나 늦으려나. 고기는 다 식어서 퍽퍽하고 질겨졌을게 뻔하고 파스타도 다 말라서 면들이 서로 들러붙은 게, 썩 입맛을 돋우는 모습은 아니었다. 고심하여 고른 케이크도 생크림이 윤기를 잃고 있었고, 테이블을 수놓은 촛불의 불빛도 로맨틱하기는 커녕 초라하게 꺼져가고 있었다. 세시간이 다 되게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한숨을 쉬고 일어나 기계적으로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고기는 내일 아침에 어떻게든 다시 잘 구우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파스타는.. 나중에 배 고프면 내가 먹지 뭐. 정리를 끝내고 식탁에 앉아 케이크를 보고 있으니, 자기도 모르게 게일은 목에 벽돌이 꽉 막힌듯한 울컥함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같이 기념일을 축하했을 때가 언제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있었다 해도 너무 조용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에 지나갔을 것이다. 아마 이 집 안에서였겠지. 모든게 그랬으니까. 그래도 돌아보면 행복했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많았다. 그저 다들 커튼 뒤에서 일어났을 뿐이지만.
 
사실상 게일과 미스트라의 관계는 시작부터 지난 오 년 동안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캠퍼스에서 마주칠 땐 눈 깜빡하면 놓칠법한 서로를 향한 곁눈질. 연구 관련 질문을 핑계로 길어졌던 미스트라의 오피스에서 보내던 시간. 모든 것이 벌어졌던 그의 집 침대 위, 그리고 혹시나 누가 볼까 새벽에 후드를 쓰고 쫓기듯 나오던 게일. 처음엔 그것마저도 스릴 있고 짜릿한 경험들이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매력적인 밀회.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더라도 서로만은 알 수 있는 열정과 열기. 남들의 눈을 피해 서로를 스치던 깃털만큼 가벼운 접촉들. 그때 그는 젊다 못해 어렸으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제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미스트라의 관심은 가히 신성한 것이었고, 그것에 매료되고 중독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누군가는 냄새를 맡게 되어있지만,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감히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에 수군거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게일이 교실로 들어올 때마다 귀신이 지나간 듯 사그라드는 동료들의 말소리. 눈에 보이는 귓속말들. 어떤 이를 그를 향해 의아한 표정을, 어떤 이는 경멸의 눈초리를, 또 어떤 이들은,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동정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때는 다 질투와 시기라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것 앞에서 게일은 당당했다. 처음 그가 게일에게 다가왔을 때 커리어적인 호기심이 단 한 줌도 없었냐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서로 나눈 열정적인 토론과 미스트라가 그에게 나누어준 지식들은 그에게 영감을 주긴 했지만 결국 게일이 이룬 모든 것들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이다. 아니, 게일을 미스트라에게로 끌어당긴 건 의심 없는 사랑이었다. 그의 손길 아래 게일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그와 있을 때면 남들은 보지 못하는 자신이 이해받는다고 느꼈다. 자신이 날 때부터 남다르다는 건 워낙에 많이 들어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페이룬 전역에서 이름을 떨치는 존재에게 관심과 인정을 받는 건 그때까지 겪어보지 못한 환희를 가져다주었다. 목 뒤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이어지는 찌릿하고 붕 뜬듯한 감각. 미스트라를 볼 때마다 떨리는 가슴은 사랑이 아닐 리 없었다. 책상에서든, 침대에서든, 무엇이든 잘하기만 하면, 눈에 띄기만 하면 제 연인의 관심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뭔가를 잘하는 건 게일의 특기였고. 
 
그래서 지금 이건 순전히 연말이라 제 애인이 너무 바쁜 탓이라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게일은 목을 타고 올라오려는 울컥함을 억지로 삼켰다. 그냥 그가 걱정되고, 보고 싶을 뿐이야. 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낸 지 오래되었으니까. 오 년이나 사귄 사이면 이만큼 편안해지는 것도 당연한 거고. 관계에 좀 새로운 게 필요할지도 몰라. 사랑은 원래 이런 거지.  
 
원래 이런 건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끝도 없고 쓸모도 없다. 케이크라도 나중에 오면 같이 먹게 놔둬야지. 그래도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아무것도 없으면 너무 허전하겠지. 이제는 다 타서 연기만 올라오는 양초를 치워놓고 게일은 다시 소파로 향했다. 머리가 아파 전등까지 끄니 방 안을 비추는 건 차가운 달빛과 뿐이다. 시간은 늦어만 가는데 세상을 덮은 눈 때문에 창밖은 환했다. 이 높은 꼭대기 층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게 장난감처럼 작아 보이는데도 짝을 지어 걷는 이들은 유독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다들 어디를 가는 걸까. 웃고 있을까. 기분 좋은 데이트라도 하고 왔나. 밖에서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쓰고도 서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방 안은 따뜻한데도 속 깊은 곳으로부터 추위가 느껴지는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점점 빠져나가 텅 빈 바닥이 보일 때까지 게일은 연락 없는 제 연인을 기다린다.
__
 
영재. 천재. 어머니, 게일은 정말 크게 될 아이예요, 지금부터 서포트를 해주시면... 야, 너는 공부도 별로 안 하는 거 같은데 어쩜 그렇게 매번 만점이냐. 넌 타고나서 좋겠다, 난 죽어도 안 풀리던데. 이걸 네가 썼다고? 이 정도면 출판해도 되겠는데? 대학 합격 축하한다, 전액 장학금이라며? 게일? 조금 재수는 없던데 그래도 확실히 무시는 못 하겠더라. 걔 이번에 논문 낸 거 봤어? 그렇게 어린데 이력서가 벌써 땅에 닿겠다, 야. 아, 네가 이번에 조기 졸업하고 바로 온 애구나, 대학원 생활은 어때? 만나서 반갑다 게일, 네 이력은 예전부터 눈에 띄어서 잘 봐두고 있었어. 그냥 미스트라라고 불러도 된단다 - 밖에서나 총장이지, 우리끼리 있을 때는 다르잖니? 
 
 
너는 참 특별하구나, 게일. 
__
 
문이 닫히는 소리에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게일은 일어났다. 막 떠오르는 아침해가 그의 등에 내려와 앉았다. 자기도 모르게 소파에서 잠들었나 보다, 목과 허리가 항의하듯 뻐근한게 느껴졌다. 아직 초점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눈앞으로 거실로 들어오는 미스트라가 보였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 창피해 급하게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는 게일에게 눈썹 한쪽을 올려 보이는 것으로 미스트라는 인사를 대신했다.
 
"아, 미안해요, 깜빡 잠들어 버렸네. 케이크 -"
"기다리지 말라니까. 집에 가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미련하게."
"아...." 
 
그러게.
 
나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미련하게... 안에서 게일을 지탱하고 있던 뭔가가 툭 끊기는 듯했다. 멍하게 욕실로 들어가는 미스트라를 보던 그는 볼에 젖은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 눈물이다. 어라, 나 왜 울고 있지. 이제 집에 왔으니까, 다 괜찮은데. 난.... 
 
당황도 잠시, 한번 터진 눈물은 댐이 무너진 듯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와서 그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숨을 크게 쉬어보려 해도 폐가 얼어붙은 듯 얕은 호흡만 할 수 있었다. 제 연인을 불러 보려 하지만 목이 막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마치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손들이 단어들이 나가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그의 목을 덮어 누르는 듯했다. 안돼. 이건 안돼.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어. 그에겐 최고만, 항상 완벽만...
 
벽 하나를 두고 자신은 죽어가고 있는 그 순간, 그의 연인은 그 소리조차 못 듣고 있었다. 듣는다 한들 그를 살려줄 수 있을까. 샤워기의 물살과 자신의 젖은 숨소리만이 게일의 귓가에 울린다. 익사하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더 가라앉기 전에 게일은 도망치듯 아파트를 떠난다. 
__
 
"정말... 정말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그의 밑에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게일은 미스트라와 눈 마주치려 애원한다. 그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인다. 어딘가 서늘한 그 눈빛 아래에서 게일은 절정을 맞으며 이게 사랑이라 믿는다.
__
 
미스트라는 게일보다 항상 일찍 일어난다. 잠에서 깨면 흐트러지고 초라하게 보이는 자신과는 달리 미스트라는 벌써 완벽한 차림새로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거나, 아예 이미 나가고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 그런 정돈 안 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 연애 초반에는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려 노력도 해봤지만, 알람 시계처럼 매일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는 그를 이기기엔 게일은 너무 인간적이었다. 그래도 또래들과 비교하면 제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편에 속했는데, 미스트라와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건널 수 없는 강 건너에 있는 기분이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더 싫었던 건 아침에 일어나면 차갑게 식어있는 침대였다. 전날밤에는 황홀하기만 했던 퀸사이즈 침대가, 혼자 깨어난 아침에는 평소의 푹신함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텅 빈 우주처럼 광활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고요한 방에서 혼자 그 넓은 침대에 누워있을 때면 인정하기 싫은 외로움이 단순한 감정이 아닌 물리적 고통이 되어 다가왔다. 같이 있어달라는 그 유치한 마음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 말없이 투정도 부려보고, 최대한 진심을 담은 애원의 눈빛을 보내봐도 미스트라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다음에
 
그렇게 은은한 웃는 얼굴로 하는 대답이니 더 이상 뭐라 대꾸할 수도 없어서 점차 그 차가운 침대 시트가 보통이라고, 정상이라고 게일은 자신을 설득시켰다. 분명 제 애인인데도 가끔은 그가 너무나도 멀리 있는, 저 하늘에서 빛나는 별 같다는 느낌을 시간이 지날수록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 관계를 시작했을 땐 나도 옆에서 같이 반짝였던 것 같았는데, 난 나를 별이라 믿었지만 어쩌면 그저 그의 빛을 반사시키고만 있는 연못이었을까. 
 
속에 엉킨 자신도 모를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토로해보려 해도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속마음을 털어놓을만한 친구들은커녕, 친하다고 할 사람들 자체가 원체 적기도 했고, 말을 해봤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걔네들은 시시하게 자기 애인이랑 영화관 데이트나 하는 이야기, 유치하게 놀이공원이나 가는 이야기, 어떻게 고백을 할까 끙끙대는 이야기만 해대었다. 마지못해 호응해 주면서도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것들을 경험하고 있어, 우리가 가진 건 정말 남다르니까. 너무 특별한 거라, 내 아픔도 특별한 거야. 
 
만약 마음 한편에서 그리 자랑스럽게 사랑을 내놓을 수 있는 그들을 향한 부러움이 작게나마 있었다면, 절대 자신에게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__
 
"엘민스터 교수님, 저 보자고 하셨죠?"
 
"아, 게일. 와줘서 고맙구나. 심각한 건 아니란다. 내가 아끼는 제잔데, 요즘 안부 물을 기회도 없는 것 같아서 불렀지."
 
"우리 거의 매일 연구실에서 보는데요?"
 
"그저 바라보는 것과 같이 대화하는 건 다르단다, 너도 알지 않느냐?"
 
"교수님 -"
 
"게일, " 엘민스터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른 심각함을 띤다, "요즘 괜찮니?"
 
"어... 갑자기 사람 긴장하게 목소리를 깔고 그러세요 왜. 요즘 잠을 좀 설치긴 했지만 괜찮아요, 연구엔 지장 없어요."
 
"일 관련 이야기로 널 부른 게 아니란다. 말 안 해도 잘하는 건 잘 안다."
 
"그럼 왜..."
 
"...." 어떤 결심을 한듯 그는 심호흡을 한다, "혹시, 미스트라가-"
 
"엘민스터 교수님." 게일은 심장이 철렁하는 걸 느끼며 의도치 않게 공격적인 톤으로 대답했다. 
 
"게일, 난 그저 네가..."
 
"저도 성인이고, 제 앞가림은 제가 할 수 있어요. 혹시 부정한 혜택 같은 게 걱정되시는 거라면 제 목숨을 걸고 -" 
 
"내가 걱정되는건 너뿐이란다. 늙은이의 노파심이라고 생각해 주려무나."
 
"...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자세한 것도 모르시잖아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게일 -
 
서둘러 방을 떠나려는 그를 엘민스터는 마지막으로 불러 세운다. 뒤를 돌아보니 그는 세상 모든 안타까움을 짊어진 얼굴을 하고 있다.
 
"요즘 밤이 길어졌더구나.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하거라."
__
 
집으로 돌아와서도 눈물이 꾸준히 멈추지 않아 짜증이 났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동정이라도 싫었다. 깊은 곳에 선 게일도 알았다, 자신이 미스트라의 유일한 연인은 아닐 것이란 걸. 어쩌면 연인이라는 말조차 이 관계에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을 수도. 그는 아마 수많은 사람들의 멘토이자 영감을 주는 존재고, 이런 관계에 빠진 이가 자신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것이란 걸. 게일은 똑똑했다. 너무 똑똑해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마저 완벽하게 해내었다. 하지만 한번 들추어진 베일을 다시 덮기엔 역부족이다. 
 
원망과 분노가 그 추악한 고개를 내밀어서, 항상 그랬듯이 그는 그 감정들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재조준한다. 받아들일 수도, 떠올리기도 싫은 감정들이다. 미스트라는 나를 알아보고, 사랑해 줬어.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 내게 기회와 희망과 인정을 주었지. 내가 뭐라고 감히 그를 원망하겠어. 그는 그의 소중한 시간을 내서 날 만나주고 있는 것인데, 평생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데. 
 
타라가 다가와 무릎에 볼을 비비댄다. 그의 규칙적인 고롱대는 소리를 들으며 게일은 진정하기 시작했다.
 
유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미스트라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다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면 그중에서 최고인 존재는 될 수 있겠지. 최고로 그를 위하는 사람. 그의 관심을 사로잡을, 그래서 나를 처음 그 느낌으로 안아줄 수 있게 할 무언가가 있겠지. 그가 날 처음 발견한 것도, 내 업적 덕분에, 성취 덕분에,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내가 하는 걸 더 잘하기만 하면 되겠지. 그건 어렵지 않지, 항상 하던 거니까. 조금만 더, 그를 위해서...  
 
거기까지 생각하곤 게일의 뇌는 회전을 멈췄다. 헛웃음이 났다. 이 분야 최고자인 그의 눈에 찰 수 있는 게, 새로운 게 있기는 할까. 그의 눈에 난 한 번도 충분하긴 했을까, 아니면 내가 하는 모든 게 애들 장난처럼 보였나. 감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지만 게일은 미스트라 곁에 있을 때마다 자주 자신이 작게 느껴지곤 했다. 처음엔 그저 매력적인 상대와 있을 때의 긴장감이라고, 그다음엔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자신을 조금 뒷전으로 놓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애인을 자신보다 높이 대우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연인의 발치에서 그를 신처럼 받드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다.
 
하지만 게일이 정말로 솔직한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그의 두려움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면, 그 작아지는 기분이 가슴 깊이 박힌 열등감이란 걸 알아챘을 것이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대해선, 무엇이든 잘한다는 것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니, 그 불안은 보통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그건 자신이 얼마나 발버둥을 치고 발악을 해도 절대 미스트라와 동등한 곳에 설 수 없다는 진실에서 나왔다. 어쩌면 십 년 정도 지나면 그에게 도달할 만큼의 업적을 쌓을 수 있을까. 그때면 그가 나만을 봐줄까. 아침에 일어나도 침대 옆자리에서 날 반겨줄까. 같이 기념일을 보내고, 남들처럼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을까. 같은 공간에 서 있어도 숨을 참지 않아도 될까. 그대의 따스함이 어떤 건지 느낄 수 있을까. 하지만 아마 그때도 미스트라는 저 멀리, 게일이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게일은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 진실은 6피트 땅을 파고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버렸다. 대신 그는 언제나 그렇듯 헌신을 택했다. 
__
 
"아, 정말 멋져요, "그" 미스트라의 개인 컬렉션이라니!"
 
장난감 가게에 온 아이처럼 게일은 방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절판되어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서적과 고서들, 여러 문명과 문화를 담고 있는 미술 작품들, 그의 개인 업적들과 과거의 흔적들. 보통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공간.  
 
"천천히 봐도 좋아. 특별히 흥미 있는 게 있으면 빌려가도 좋고."
 
"진심일리가... 정말요? 여기 있는 것들은 다 제 팔 한쪽 보다도 비싼 것 들일 걸요. 제 무릎도, 다리도, 어쩌면 몸 한쪽보다도 더...."
 
"진짜야, " 미스트라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심히만 다루면 돼."
 
"어, 그렇다면... 아, 이건 뭐죠? 현대 속 고대문명: 네더릴이 녹아있는..." 제목을 채 끝까지 읽기도 전에 미스트라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게일이 들고 있던 논문을 그의 손에서 집어갔다. 
 
"예전에 하다가 중단했던 연구야. 아쉽게 되었지만, 이젠 오래된 일이지."
 
"중단하셨다고요?"
 
"정확히는 중단된 거지. 별로 흥미로운 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어... 혹시, 혹시 그거 제가 좀 더 봐도 될까요?"
 
이거? 미스트라는 논문과 게일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종이를 옆 테이블에 던져놓고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될 거 같아. 하지만 다른 건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게일?"
 
미스트라의 향수냄새가 훅 끼쳤 왔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고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자신을 점차 덮어오는 그의 체온을 느끼면서도, 게일은 그 논문을 생각했다.
__
 
나는 다르지.
 
나라면 완성할 수 있지. 이거라면 날 증명할 수 있지. 
 
나는 특별하니까. 
__
 
 
 
(스포일러: 그는 실패한다)
 
 
 
__
 
게일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미스트라의 눈은 싸늘하다. 희한하다. 수치심에 온몸이 안쪽에서부터 불에 타 녹고 있음에도, 그의 그 차가운 눈빛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__
 
"게일,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글쎄, 잘 모르겠어!" 8살의 게일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래도 하나만 정한다면? 나중에 바꿔도 괜찮아."
 
"음..."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찬 얼굴로 게일은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고민한다.

”친구들이랑, 엄마랑, 타라랑, 매일 놀고싶어. 같이 우주여행도 가고. 매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어."
 
"그건 되고 싶은게 아니라 하고싶은거잖아? 뭔가 특별하게 되고싶은건 없는거야?"

"특별해야 하는거야?"
__
 
최악의 날이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갑자기 쏟아지질 않나, 신발 밑창은 갑자기 어디 끼어서 다 벗겨지질 않나. 춥고, 배고픈데, 길까지 잃어버렸다. 저녁 먹다 답답해서 산책이나 나와보자 했는데, 정신 놓고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도통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새로운 도시라고 너무 얕봤나. 아직 랜드마크들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여기저길 둘러봐도 다 똑같이 보이는 건물들 뿐이다. 뭔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 했는지 지갑조차 집에 놓고 나왔다. 거진 일 년을 거의 집 밖에 안 나가다 보니, 모든 센스가 다 증발했나 보다. 발더스 게이트여, 제발 나를 친절하게 대해줘. 내일이면 첫날인데, 너무 늦기 전에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래서 학교는 잘 찾아갈 수나 있으려나. 해는 또 왜 이리 빨리 지는지, 난 밤눈도 어두운데. 
 
두통이 올 정도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게일은 어느덧 어떤 횡단보도 앞에 섰다. 아, 여기는 좀 낯익은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서 건너서 왼쪽으로 가면... 
 
조금 자신이 붙어 앞으로 뛰어가는데, 이번엔 핸드폰이 말썽이다.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던 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랬는지 떨어져 물 웅덩이로 추락한다. 자신은 건장한 성인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고 전화기를 집으러 간다. 축축한 거 질색인데.
 
잠깐 - 
 
무슨 일인지 고개를 들어 보기도 전에 게일은 자신의 손을 꽉 잡은 낯선 손과 몸이 뒤로 쑥 끌려가는 걸 느꼈다. 차 한 대가 속도를 내며 제 코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일초정도 멈춰있던 게일은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인도로 올라왔다. 뭐야, 나 방금 진짜 죽을 뻔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얹으려다가, 아직도 제 오른손이 누군가에게 붙들려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 사람도 그때서야 자기가 계속 게일을 잡고 있다는 걸 자각했는지 흠칫하며 그를 놨다. 뒤로 돌아보니 자기와 비슷하게 놀란 눈을 한 사람이 게일을 마주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놀래서 제대로 감사인사도 못 드렸네요. 하마터면 도로 위에 추한 데코레이션이 될 수 도 있었는데, 그 운명에서 절 구해주셨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게일은 자기 볼 안쪽을 깨물며 속으로 자신을 저주했다. 일 년 동안 사회랑 고립되어 있었다고 이렇게까지 대화가 부자연스러울 일인가. 말하는 법을 다 잊은 느낌이다.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라 여기고 빨리 자리를 뜰 거라 생각한 그의 생명의 은인은 오히려 웃어 보인다. 편안한 목소리다.
 
"하, 죽다 살아난 분 치고는 유머감각이 뛰어나네요. 괜찮아요, 진짜? 참고로 그쪽은 잘못한 거 없어요, 아직 노란불이었는데 저 차가 그냥 치고 나간 거라서."
 
"진짜 괜찮아요. 놀라서 정신은 아직 조금 없지만. 발더스 게이트는... 스릴을 즐기는 운전자들이 많은가 보네요. 잠깐, 내 전화 -"
 
뒤를 돌아보니 게일의 핸드폰이 슬픈 모습으로 조각난 채 도로를 나뒹굴고 있었다. 아. 아직 약정 일 년 남았는데. 아니 그것보다, 내일 아침에 관계자가 연락 준다고 했는데 어쩌지.
 
"저기... 전화 빌려드릴까요?"
 
"네?"
  
게일의 큰 눈이 더 커졌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날 구해준것도 모자라 전화까지 빌려준다고? 난 아무것도 해준게 없는데도? 눈동자를 떼굴떼굴 굴리고 있는 게일의 표정이 재밌었는지 상대방은 다시 한번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핸드폰을 아련하게 보시길.. 아니, 어디 연락할 곳이 있는 것 같아서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타브라고 해요, 반가워요."
 
사람 좋게 웃으며 타브가 손을 뻗어온다. 그 손을 멍하게 보던 게일은 정신을 차리고 악수한다. 떨어지는 빗속에서도 온기가 그에게로 전해져 온다. 그의 가슴이 갑작스레 간질거리고 코끝이 찡해져 오는 걸 느꼈다면, 분명 그냥 봄 감기의 전조증상일 것이다. 
 
"반가워요, 타브. 난 게일이에요."
 
 
 
우리는 사랑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