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리오스 씨, 감기 걸리겠어요. 이제 들어와야죠. 제 간식 시간도 훨씬 지나버렸고 말이에요."
망원경에 코를 박고 벌써 3시간째 밤하늘에 보고 있던 12살의 게일 데카리오스는 타라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제 트레심을 마주했다. 담요로 온몸을 꽁꽁 싸매었음에도 가을의 서늘한 밤공기는 그의 코와 뺨을 붉게 물들여놓은 채였다.
"타라! 간식을 까먹은 건 미안해... 하지만 이번주가 아니면 미스트라의 스타 서클을 이렇게 선명하게 볼 수가 없는걸." 코를 훌쩍이며 게일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자리 하나를 향해 손짓했다. 청량한 어둠 속, 반짝이는 크고 작은 별들이 모여 거의 완벽한 원을 그렸다. 그 아래, 그의 눈은 별빛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흠- 하는 콧소리와 게일의 어깨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타라는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저건 내일도 하늘에 떠있을 예정이란 거죠. 저는 안타깝게도 그때까지 간식을 기다릴만한 참을성이 없고요. 계속해서 그렇게 보다간 미스트라도 질려서 저 밤의 성 문을 닫아버릴걸요." 게일의 눈이 타라의 말에 반응하며 반짝였다.
"정말로 밤의 성이 저 안에 있을까? 그 안엔 미스트라가 살고?
어릴 적 모레나가 자주 이야기해 주던 동화였다. 저 별들 중앙에는 미스트라가 주인인 밤의 성이라는 곳이 있다고. 그래서 저 별 아래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 은총을 받아 호기심이 많고 똑똑하며, 예술과 마법에 이끌린다고. 게일은 자신도 그랬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 때부터 미스트라의 눈에 담겼을 아이들. 저 환상 속에 싸인 성의 안쪽을 조금이지만 엿보았을 테지. 어쩌면 그를 잠시라도 목격했을 수도.
"글쎄요, 데카리오스 씨. 분명한 건 여기서 더 있다간 분명 감기에 걸릴 거고, 그렇게 되면 성은커녕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거예요. 미스트라를 만나는 것도 좋지만, 오늘밤은 이만 저랑 불이나 쬐는 게 어때요?"
꼬리를 팡팡대며 재촉하는 타라를 보며 배시시 웃은 게일은 드디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유독 밝은 별빛이 그의 뒷모습을 좇아 비추는 듯했다.
__
게일, 너는 현실에 발 붙이고 살 필요가 있어.
게일, 너는 그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좀 멈춰야 해. 언젠간 큰코다칠 거야.
게일, 듣고 있어? 공상은 그만하고 제대로 내 말 좀 들어봐.
게일은 항상 별들을 동경했다. 밤하늘의 별들 사이에는 무한한 가능성들이 떠다녔으며, 자신도 언젠가 그곳을 거닐 것이라 희망했다. 하늘을 보며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어도, 남들이 또 말도 안 되는 야심을 늘어놓는다고 혀를 내둘러도, 그는 눈앞에 있는 아는 거리보단 예측할 수 없고 신비로운 저 위가 좋았다. 그곳에선 위대한 것들을 할 수 있겠지. 아무런 제약도 없고, 상상도 못 할 마법들을 보게 되겠지. 운이 좋다면 신들도, 미스트라도 만나볼 수 있을 거고, 모두들 나를 우러러보겠지.
그 좋은 운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처음 미스트라가 그의 영혼을 어루만졌을 때 그의 세계는 확장됨과 동시에 폭발했다. 꿈만 같았던 몇 년이었다 - 실제로 직접적인 접촉보단 영혼이 얽힌 적이 더 많기도 했고. 필멸자라면 그리지도 못할 풍경들을 보았고, 어떤 위저드라도 탐낼만한 마법들을 보고 다루었으며, 무엇보다 미스트라의 눈빛 아래에서 그는 특별함으로 가득 찬 누군가가 되었다. 평범하고 잊히기 쉬운 게일 데카리오스가 아니라 워터딥의 게일이 되었다. 주위의 떠다니는 흔한 먼지가 아니라 제 신의 은총으로 가득 차 빛나는 하나의 특별한 별. 옆자리에서 1, 2위를 다투던 수습생들 보다도, 자신을 거쳐간 수많은 내로라하는 튜터들보다도, 어릴 적 부러워하던 미스트라의 성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도 그는 위브와 - 저의 신과 - 가까웠다.
다른 이들의 평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걱정조차 짜증 났다. 다들 저를 끌어내리려 한다 생각했다.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남아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외로움이나 상실감보단 영혼의 화합에서만 오는 쾌락을 모르는 그들이 불쌍했다. 천상을 상상도 못 할 이들이 가소로웠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제 제게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누군지 이해 못 해, 나를 아는 건 내 신이니까. 굳이 땅에 발 묶여있을 필요는 없지. 미스트라만, 그의 인정과 총애만 있으면 되는데. 그만 감명시키면 되는데. 조금만 더 위브로 자신을 채우고, 어제보다 더 대단한 스펠을 외고, 제 모든 걸 바쳐 그를 만족시키면 되는데.
하늘을 보는 것보단 하늘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두려운 것 하나 없이 높은 그의 마음은 추락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그는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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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딥의 게일
형용할 수 없는 목소리로 미스트라가 게일을 부른다. 신의 눈동자 안, 수많은 별들 속에서 허우적대는 게일은 그를 향해 묻는다.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나요?
그의 신은 대답 없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돌아선다. 게일은 차가운 별들 속으로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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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만에 느껴보는 누군가의 온기였다.
게일은 자신이 신체 접촉이 제게 그다지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추상적이고 손에 결코 잡힐 수 없던 관계에 익숙해졌던 게일은 일 년간 탑에 갇혀 살며 접촉의 의미를 더더욱 잊어버렸다. 살아남기에 급급해 타인의 온기 따위를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무릎에 앉은 타라를 쓰다듬으며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으로 애써 가슴속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안정감이라 믿었다. 몇 겹의 두꺼운 이불과 베개에 파묻혀 침대 속으로 가라앉는 게 편안함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게일은 왜, 세상밖으로 이끌려 나가던 그 찰나의 순간에 느낀 타브의 손길이 그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질 몰랐다. 포탈에서 나와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주는 타브의 손을 잡으니 그 체온이 그대로 자신에게로 타고 흘러 들어왔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온기가 괜히 그리워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한번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자신도 몰랐던 결핍이었다.
"만나서 반가워, 게일. 난 타브라고 해." 타브는 씩 웃으며 게일의 손을 꽉 잡아 그의 악수에 화답했다. 분명 정상체온임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그의 세상이 흔들렸다.
그날 밤, 모닥불을 쬐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게일은 문득 타브의 손길이 지금 자신 앞에 있는 불보다 더 따뜻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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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은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전투 중 쓰러진 자신의 팔을 잡고 급히 일으켜주는 손으로부터, 물약을 건네줄 때 닿는 손끝으로부터, 고맙다고 말하며 가볍게 제 어깨를 툭 치는 손등으로부터.
그것은 미묘한 것들로 인해 커진다. 오랫동안 걸을 때 점점 느려지는 자신의 보폭을 맞춰주는 다리로부터, 시시한 농담에도 항상 웃으며 따스하게 자신을 봐주는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제일 깊은 수치를 보여주었을 때 동정보단 걱정으로 가득 차오르는 얼굴에서부터.
차마 말할 수 없는 감정은 그런 순간들이 쌓여 싹튼다. 위브에 감싸여 교환했던 찰나의 열기 오른 상상으로부터, 이야기할 때 서로의 입술에 사회적 합의된 적절함보다 더 오래 머무르는 눈빛으로부터, 자신의 바로 옆에 붙어있어도 불편함은커녕 기분 좋은 간질거림만으로 채워지는 심장으로부터.
땅에 발을 대고 있어야만 느껴지는 것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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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은 자신이 사랑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신의 연인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미스트라는 마법만이 아니라 사랑에 관해서도 그의 선생이었다. 그의 아래에서 자신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바쳐 구애하는 법을 배웠다. 상대방의 만족을 위해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같이 지낸 시간들은 얼마나 달았는지, 얼마나 황홀했는지. 그와의 만남이 끝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감각들이라 해도, 그 짧은 순간들은 더더욱 그의 신과의 시간들을 소중하게 만들었다. 가히 중독적이었고, 제 연인을 갈구하며 그걸 사랑이라 되뇌었다. 그래서 서로의 끝이 어떻게 되었든 그는 평생 그와 나눈 시간과 기억들을 그릴 것이다. 그 좋은 걸 던져버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참회할 것이다. 평생 제 신으로부터 대답이 없다 해도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받들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야 했다. 사랑이었으니까.
사랑이었나?
게일은 자신이 사랑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의 옆에 기대어 졸고 있는 타브를 보며, 그의 몸이 자신의 어깨에 포근하게 꼭 맞는 것을 느끼며, 색색거리는 타브의 숨소리를 들으며, 불침번을 교체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차마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아 하는 자신을 보며, 게일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
어쩌면 아직 배워야 할게 많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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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미스트라의 명을 따를 생각은 아니지?"
분명히 오브가 더 이상 그를 갉아먹는 게 아닌데도 게일의 얼굴은 창백했다.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는지 그의 왼쪽 엄지손톱 아래론 피가 새어 나온 흔적이 보였다. 탸브의 말에 어딘가를 떠돌고 있던 게일은 현실로 돌아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미스트라를 위해서만이 아니야. 너도 들었잖아. 앱솔루트는 이 세계 자체에 드리운 거대한 위험이라고. 이 전염병이 더 퍼지기 전에 뿌리에서 잘라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고작 인간 한 명과 고대 제국의 마법 파편 하나라면, 내가 생각하기엔 꽤 좋은 계획 같은데."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게일의 눈에는 그의 나이를 훌쩍 넘긴 만큼의 세월의 피곤함이 비쳤다. 타브는 제발 정신 차리라고 한대치고 싶은 충동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 미소를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게일, 넌... 넌 살아있는 사람이야. 어떤 마법 주문에 필요한 재료 같은 게 아니라고. 만약 미스트라가 이 명을 주지 않았더라 해도 넌 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게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피곤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온몸이 진흙으로 뒤덮인 듯 무거웠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신의 용서는 흔하지 않다. 이건 어쩌면 유일하게 미스트라에게서 용서를, 그걸 넘어 보답까지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어깨는 이미 후회와 자책으로 무거웠다. 이 실패의 무게까지 지니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건 지금 우리에게 없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은 아니지 않을까? 무엇보다, 나는 그에게 진 빚이 있어. 난 뭔가 틀린걸 안 고치고 그대로 놔두는 건 질색이거든, 특히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내 자서전의 엔딩을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수정하려는 거라고 생각해 주면 어때? 난 어쩌면 역사상 아주 드물게 신에게 용서를 받은 자가 될 수도 있겠지."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눈을 피하는 게일을 보며 타브는 그의 두 손을 너무나도 따뜻하고 간절하게 움켜쥐었다. 나를 봐. 같이 여기에 있어. 겨우 다시 자신을 마주 본 게일을 향해 타브는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게일, 미스트라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는 네게 흥미가 있었고, 널 이용한 거야."
게일은 타브의 말에 차가운 물이라도 뒤집어쓴냥 멈췄다.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던 그는 드디어 제대로 된 문장을 생각해 내었다.
"아, 어, 아니, 전혀 그런 게 아니었어. 사실상 먼저 그런 식으로 다가간 건 나였지, " 당황을 침과 함께 삼킨 후 게일은 최대한 평소의 웃는 얼굴을 보이려 했다. "이런 걱정을 들은 게 이번 처음은 아니야. 상황이 상황이니,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모든 건 서로의 완벽한 동의를 전재로 -"
"거부할 수 있었어?"
뭐?
만난 후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게일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타브는 말을 이었다.
"네 멘토였고, 선생이었고, 뮤즈였다며. 네가 설령 거절하고 싶다 했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미스트라에게 기대고 사랑하게 된 건 네가 빠져나갈 수 없는 설계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어?"
속이 답답하고 꽉 조여 오는 게, 오브 때문만은 아니었다.
“타브, 네가 날 걱정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미스트라를 향한 나의 사람은 진심이었어." 게일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위험한 빛을 띠며 낮아지는 걸 느꼈다.
”알아. 그건 의심하지 않아. 나는 네가 아니라 미스트라를 심판대에 놓고 싶은 거야. 이것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 봤거든. 그래서, 네가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믿어? “
게일은 자신이 다시 타워 안에 갇힌듯한 느낌을 받았다.
”...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말했듯이, 내가 먼저 원한 거였고, 관계를 시작했을 땐 알 것 다 아는 성인이었다고."
"상식적인 사람.. 아니 신이더라도, 신이니까, 널 거부했어야 했지. 너는 그의 학생이었고, 선택받은 자였고, 필멸자고, 미스트라는 전지전능한 신이었으니까. 처음부터 균형이 절대 맞을 수 없는 관계였어. 미스트라는 이걸 더 잘 알았어야 해. 그리고 그는 지금 이걸 빌미로 너를 또다시 이용하려 하고 있고." 타브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신이라서 그런 상식도, 죄책감도 없는 걸까."
그만 - 동료들이 일제히 그들을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크게 소리를 내었단 걸 알아차린 게일은 겨우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타브, 네가 지금까지 내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이 청하지 않은 조언까지 말이야." 애써 점잖게 조절된 그의 말은 미쳐 독기를 숨길수는 없었다
"하지만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 해도, 난 내가 한 사랑에 대해선 절대 후회도, 죄책감도 가지지 않을 거야." 단호한 말투로 게일은 이 대화의 끝을 내고자 했다. 여전히 담담하게 안타까운 표정을 하며 듣고 있던 타브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연하지. 죄는 미스트라의 것이어야 하니까."
__
나는 도대체 어떡하면 다시 당신에게 사랑받을 수 있죠?
게일은 그의 신의 뒷모습을 보고 소리친다. 산이 솟아나고 땅이 갈라진 틈새로 목소리가 들린다.
워터딥의 게일
처음부터 그대의 것이 아니었던 건 가질 수 없단다
게일은 소리치며 깨어난다.
__
"안 추워?"
생각 속에 빠져있던 게일은 타브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미스트라의 전언이니, 거기에 대고 타브가 한 말이니, 속이 복잡해서인지 습관과도 같은 저녁 준비를 망쳐버렸다.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 뿐이니 동료들은 별 말 하지 않았지만, 자신만은 간이 전혀 맞지 않는 결과물에 실망해 캠프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 옆에서 자신을 가두고 있었다. 겨우 현재로 돌아온 게일은 타브의 얼굴을 보니 거기다 대고 소리를 치고 싶은지, 무시하고 싶은지, 아니면 안겨 모든 걸 토해내고 싶은지 정할 수가 없었다. 게일의 주저를 언짢음으로 인식했는지, 타브는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옆에 앉았다. 게일이 자기 자신에게 더 솔직한 사람이었다면 아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었어, " 타브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그 말로 너에게 들이닥친 건 부적절했어. 진심으로 사과할게. 아마.. 아마 내 감정이 먼저 너무 앞섰나 봐. 나도 모르게... 화가 났어." 진심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타브를 보며 게일은 그의 뺨이 어느샌가 더 짙은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게일은 순간 자신 안의 헝클어진 감정덩어리가 감히 말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감정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사과는 고맙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신경 써서 그런 말을 해준걸 알아. 하지만, " 게일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다음엔 어쩌면 서로를 안지 적어도 두 달 정도는 지난 후에 서로의 전 애인에 대해 말을 얹는 게 어떨까? 우린 아직 둘이서만 오붓하게 식사도 하지 않았는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한 농담에, 타브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게일, " 타브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어제 만났다 하더라도, 아니, 네가 길거리에서 지나치다 잠깐 마주친 사람이라 하더라도 네게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았다면, 그때와 똑같이 화내고 말해줬을 거야. 너는 그걸 알 자격이 있으니까. 누구라도 그런 일을 겪었다면 그걸 알 자격이 있으니까." 다정하지만 단단한 말투와, 더 다정한 눈빛으로 타브는 말했다.
자격.
무언가를 알 자격. 수용받을 자격. 걱정받을 자격. 나를 모르는데도, 아무 대가도 이유도 없이.
그런 게 있었던가. 그런 걸 알았던가. 항상 뭔가를 해야지만, 뭔가가 되야지만 자격이 주어지는 게 아니었나.
"... 나는 너에게 정당하게 화를 낼 수 있게 적어도 세 페이지 분량의 따질 내용을 준비하고 있었어. 근데,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게 되어버렸네."
"... 미안?" 어색한 표정을 짓는 타브를 보며 게일은 작게 웃었다. 웃음보다는 젖은 날숨에 가까운 소리였다.
"아니,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냥.. 생각할걸 줘서 고마워." 한층 부드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게일에 타브도 안심했는지 그의 옆에 더 가까이 앉았다. 닿고 있진 않아도 타브의 체온이 서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저에게로 전해져 왔다.
"그래서, 내가 오기 전엔 뭐 하고 있었어?"
"아. 별로 중요한 건 아니야. 별자리를 보고 있었지. 아직 보이려면 이른 계절이지만, 그래도 혹시 미스트라의 스타 서클이 보일까 해서 말이지. 혹시 알아, 나를 보고 있다고 어떤 신호라도 보낼지." 정말이지, 무거움을 웃기지도 않은 말로 넘기려 하는 버릇에 대해서 어떻게든 해야 했다.
"미스트라의 스타 서클? 아, 차가운 왕관 말이야?"
아, 그 별자리의 또 다른 이름이었지.
북쪽에서 보이는 별자리라 그렇지만, 그 외에도 꽤나 정확한 명칭이다. 처음 미스트라가 초대했던 세계로 발을 들였을 때 예상치 못한 서늘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래. 그 안에는 미스트라가 사는, 별들로 수놓아진 아름다운 밤의 성이 있다고 하지. 들어봤어?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게일의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몇 번이고 겪었던 익숙한 감정이다.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은 충동이다. 그가 놀람과 감명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봐줬으면 하는 간절함이다. 원한다면 타브에게 그 성 안을 보여줄 준비도 되어있었다. 예전 같진 않더라 해도 타브를 위해서라면 그를 감동시킬 수 있는 마법이 아직 그의 손끝에서 춤추고 있었다.
"알지. 페이룬 어린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다들 들어봤을걸. 음, 글쎄, 크게 생각 안 해봤어. 근데 외로워 보이지 않아?"
응?
"응?" 게일은 예상치 못한 답에 자신도 모르게 몸에 주고 있던 힘이 풀렸다.
"저 크고 넓은 하늘에 외딴 성 하나라니. 안에 사는 사람들이 많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쓸쓸할 것 같은데. 별들은 말을 못 하니까, 둘러싸여 있다 해도 같이 놀 사람이 없으면 난 외로울 것 같아. 그리고 난 추운 건 질색인데."
우스운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는) 저 성에 들어가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텐데, 천상의 심연에 기꺼이 자신을 던질 텐데. 너는 뚱딴지같이 외롭지 않겠냐고, 추우면 어쩌냐고 묻는다. 명성보단 그냥 같이 옆에 있을 사람들이 네게는 더 중요하다. 게일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타브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게일의 팔을 잡았다. 온기가 옷을 넘어 피부로 전달되었다.
"추운데, 나랑 같이 불 쬐러 가자, 게일"
손끝에서 춤추던 환상은 잊어버린 채, 게일은 타브를 따라 온기를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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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선택받은 자가 된다는 건 지금까지 이끌어 왔던 삶이 어떤 것이던, 꿈꿔왔던 삶이 어떤것이던 그때부턴 신의 의지를 따라야 하는 운명에 속박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이 위대하고 웅장한 속박을 원하고, 게일 또한 그랬다. 그 어릴 적, 미스트라의 관심을 끌고 총애를 받는 건 얼마나 황홀했던 일인지. 다른 꿈을 꿀 겨를도 없이, 그가 이끄는 모든 곳을 가고 싶었고, 기꺼이 그리 했다.
신이 나를 선택하기 전에 나는 무엇을 꿈꿨었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닐 텐데도, 체감상 백 년은 지난 느낌이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미스트라의 눈에 들기 위해 공부하고, 기도하고, 주문을 외었다. 그게 자신의 길이여야만 했고, 그 길을 잘 따라갔다. 그럼 그전엔? 마법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인생이었으니 그저 위대한 위저드가 되고 싶었을까. 혹시 밤하늘을 좋아했으니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나. 어쩌면 그냥 막연하게 멋진 모험가가 되고 싶었을지도.
스스로 만드는 운명은 무엇일까, 어떤 것일까. 누군가의 변덕에 이끌려가지 않고 굳세게 자신의 신념 따라, 감정따라 선택하고 움직이는건 어떤 느낌일까. 내 존재를 누군가에게 정당화하지 않고, 증명할 필요 없이 그냥 살아가는건 어떤것일까. 미스트라가 게일을 저버린 후론 살아남는데 집중하느라 그의 인생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마인드 플레이어에게 납치된 후에도 끊임없이 움직여왔다. 미래를 보는 건 사치였으며,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앞서 걸어가는 타브의 웃음소리가 고민 속을 헤엄치던 게일을 관통했다. 앞을 보니 그가 칼라크와 또 어떤 이상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듯했다. 게일의 시선을 느꼈는지 타브는 뒤로 돌아 그와 눈 마주친 뒤, 그에게만 보여주는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일도, 몇 달 후에도, 몇 년 후에도.
이 모든 게 끝난 후에도 살아있다면.
그렇다면 그땐, 그때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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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나는 신이 아니야. 날 감명 시킬 필요는 없어."
"아니, 맞아. 나라면 알 수 있지."
"게일 -" 이 문제는 시험에 나올 것이니 잘 기억해 두도록 하세요 - 타브의 눈빛이 말하는 듯했다.
"나는 그 누구의 신도 되고 싶지 않아. 신 하나를 잊기 위해 다른 신으로 옮겨가려 하는 거라면, 지금 돌아서 날 떠나가." 단호한 말투와 달리 타브의 눈은 의심할 수 없는 사랑으로 차있다. 어둠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게일은 태양아래에 서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날 진정으로 원하는 거라면, 나라는 필멸자의 불완전함이 괜찮다면, 나와 같이 여기 있어."
게일은 그를 향해 뻗은 타브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마법도, 신성도 서려있지 않은 그저 평범한 필멸자의 평범한 손이다. 조심스레 그 손을 만지니 그의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중지 끝 마디에 있는 굳은살. 세월이 그대로 수놓아진 주름과 상처들. 부드러운 손등과 달리 거끌거리는 손가락 끝. 기분 좋은 따스함; 그의 신과는 느껴본 적 없는 온도. 그 수수한 손에서 게일은 무수히 많은 약속을 본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본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면 나도 달라질 수 있을까.
게일은 제 연인의 손을 꽉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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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에서 자신을 가두던 시절, 스스로를 향해 품은 독이 너무 심해질 때면 수치심이 머리끝부터 시작해 손 끝까지 저릿하게 내려와 전신을 장악하는 걸 느낄 때가 있었다. 그 무게에 짓눌려 마비된 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그저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자신을 끊임없이 내 몰아치며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렸다. 동시에 자신은 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싶다가도 삶에 대한 집착이 머리를 들고 새어 나와 그를 말렸다. 오만해도 이기적이진 못해서 그제야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를 말렸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 위브에게 애원해 자신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릴 환상을 그려내었다. 가끔은 영롱한 하늘에, 가끔은 별들의 바다에 자신을 던져놓으면 그 순간만큼은 자신 안에 모든 걸 삼켜버릴 블랙홀 따윈 없는 척할 수 있었다. 이 무한한 공간에 자신의 운명이 있을 거라고. 미스트라가 침묵을 지키는 건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고, 그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자기는 아직 위대해질 기회가 있다고.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환상에서 돌아올수록 그의 세상은 조금 더 작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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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게일 - 타브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자세히 듣는다면 그 안에 불안을 느낄 수 있으리라.
"제대로 말해줘. 그렇게 신이 되어서 뭘 할 건데?"
"타브, 네가 원하는 모든 건 다 가질 수 있을 거야, " 제 안의 모든 절박함을 담아 최대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게일은 호소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우리를 감히 적으로 두려 하지 않을 거야. 무엇보다, 신의 변덕에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돼. 주변을 봐. 이 별에 둘러싸인 바다를, 이 모든 가능성을 봐. " 타브의 얼굴은 어두워지기만 한다.
"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충분히 가능성들이 보여."
게일은 답답했다. 자신을 다시 되찾을 수도 있는, 아니, 그것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기회였다. 어릴 적 동경하던 별들 사이를 거니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들을 창조하고 파괴할 수도 있었다. 마법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었다. 어떤 거대한 세상을 구하는 폭발이 아니더라도 다들 나를 기리고 인정할 텐데. 신들도 나를 무시 못하고 맘대로 휘두르지 못할 텐데. 내 삶은, 운명은 드디어 내 것이 될 텐데.
"왜 나를 이렇게 말리는 거야 타브? 뭐가 두려운 거야? 야망은 죄가 아니야. 야심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야."
타브의 떨리는 숨이 게일에게로 전해져 온다.
"난 네가 너 자신을 잃을까 봐 두려워, 게일. 얼마나 많은 신들이 필멸자로부터 시작하고, 네가 말하는대로 타락했지? 그리고," 불안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난 너를 잃을까봐 두려워."
"넌 날 잃지 않을 거야 타브, 넌 최고의 모습인 나를 가지게 될 거야. 우리가 앞으로 하는 모든 게 정답이 되는 거야, 직접 우리의 운명을 정할 수 있게. “ 게일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타브마저, 제 연인마저 자신을 저버릴 거란 불안감이 스멀스멀 그의 뒷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우린 항상 우리 운명을 정할 수 있었어. 너는 미스트라를 거역하고도 지금 살아있잖아. 나와 함께 있잖아."
나는 실패했어 타브!
게일의 심장을 담고 있던 병이 깨지고, 내용물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온다.
"나는 상상도 못 할 높이에서 추락했어. 평생을 내 신을 충실히 숭배하며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바쳤는데, 내 인생의 전부였던 걸 잃어버렸지.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조차 실패했어. 난 어떻게 해도 미스트라를 만족시킬 수 없었어, 그리고 더 이상 그러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이 이상의 실패는 용납할 수도, 견딜 수도 없어. 필멸자로서는 완벽할 수 없어 - 우리 불완전함의 한계를 넘을 수가 없지. 저 너머에 손만 뻗으면 천상을 볼 수가 있는데, 이 흙투성이 위에 남고 싶은 거야? 왕관이 있다면 난 너에게도 충분해질 수 있어. 너에게 걸맞은 세상을 줄 수가 있어.” 그의 눈가에 물이 차서 일렁이는 것이, 꼭 밤바다 같았다. 언제 파도가 넘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 또 실수하면, 어떻게 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돼
지난 일 년 동안 나갈 곳 없이 쌓이던 수만 가지 감정들은 게일의 안에서 그동안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응축되어 더더욱 숨겨야 하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는 아무도 그를 들여다보지 않기를 바랐고,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영혼까지 꿰뚫어 보아주었으면 하는 상반된 욕구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그의 속에서 썩어 들어가는 게 제 오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썩은 건 어찌 되든 밖으로 새어나간다.
"난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모두에게서 잊히겠지. 난 모두를, 나 자신을 실망시키는데 지쳤어. 난 후회와 실수로 만들어져 있어, 타브." 이내 파도가 넘쳐흐른다.
"난 행복하고 싶어. 만족하고 싶어. 제발, 너도 그렇다고 해줘. 이번 한 번만은 제발 내가 이기게 해 줘." 게일은 완벽한 슬픔의 모습으로 자신의 연인에게 제 심장을 바친다.
"게일,“ 그의 연인은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 가장 여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그의 볼을 한 손으로 감싼다.
”완벽의 동의어는 만족이 아니야. 완벽 너머에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지.
"완벽은 환상이야, 게일. 실패와 실수는 필멸자들의 특권이고. 네가 실패라 말하는 그 실수가 우리를 만나게 해 주었잖아. 그래서 우린 나아갈 수 있었지. 신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얽매여 평생을 살아. 다른 가능성들은 상상조차 못 한다지. 우리와 그들 중 더 많은 걸 경험할 수 있는 게 어느 쪽일 것 같아?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들 중, 넌 행복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만족했던적이 한번도 없었어? “
평소 같았으면 사랑스러웠을 타브의 따스함이 자신을 난도질하는 듯했다. 게일은 슬픔이 분노로 바뀌는 걸 느꼈다.
"우리 뇌엔 언제든지 우리를 일리시드로 바꿔버릴 수 있는 기생충이 박혀있어. 나는 거기다 도시 하나를 없앨 수 있는 폭탄도 있지. 내가 최근 뭔가에 불만족스러워했다면, 이해를 바랄게." 유치한 걸 알면서도 날이 선 말을 멈출 수 없었다.
타브는 몸을 뒤로 빼고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연인이 그에게서 멀어지자 게일은 속에서 숨이 다 달아나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와 나도 이제 끝이겠구나. 난 결국 너마저 실망시켰구나.
"나는 아침에 헝클어진 네 머리가 사랑스러워, " 타브가 그와 다시 눈 마주치며 시작했다.
네가 가끔 잘난 척을 하고 재수가 없어도 그 뿌듯한 표정이 널 미워할 수 없게 해
네가 처음 나를 사랑한다 했을 때 느꼈던 네 목소리의 떨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잘 때 가끔 잠꼬대를 하는데, 무슨 꿈을 꾸는지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져
네 이상한 농담들은 날 웃게 만들어
"네가 한번 말한 적이 있었지. 작은 순간들은 그 어떤 제국 보다도 소중하다고. 너는 지금 그걸 믿지 않더라도, 나는 믿어."
게일 데카리오스, 나는 너를 사랑해. 네 불완전함도.
해소되지 않은 결핍은 끈질겨서,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조용히 우리를 따라온다. 같은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속 깊은 곳에 선 알면서도 익숙한 길이니까 따라 걷는 것이다. 이번엔 무언가가 다르리라 기대하지만, 속으론 그렇지 않을 경우를 이미 대비하고 있다. 아무 보호구도 없이 추락하면 또다시 크게 다쳐버릴 테니. 하지만 그 순간에 실제로 무언가가 달라진다면, 원하는 걸 실제로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존재가 신의 무심함에 짓눌리는 게 아니라, 필멸자의 따스함으로 환영받는다면,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네 몸 곳곳에 나있는 상처들을 따라 그릴 때면 그것들을 평생 제 기억에 담고 싶다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실없는 소리를 늘어놔도 네가 눈을 반짝이며 들어줄 때, 난 우리 둘만의 세상에서 아늑함을 경험했다.
빈틈없이 너를 안을 때면 내 안에 꽃들이 활짝 펴 내 공허한 가슴을 채우는 걸 느꼈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게 있으면 꼭 멈춰서 봐야 하는 네 성격 때문에, 평소라면 지나쳤을 풍경의 아름다움이나 기분 좋게 머리 위를 스치를 바람을 공유할 수 있는 게 좋았다.
네 손을 잡을 때면, 그 온도를 느낄 때면, 이대로 있는 것도 괜찮겠다고 믿었다.
아,
"이 모든 것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 일어난 건 일어난 것이고, 우린 앞으로 나아가야 해." 타브는 게일의 양손을 이끌어 잡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는 게일을 삶으로, 현실로 이끌어준다.
"그러니까 나랑 함께 가자.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고, 행복해지자. 나랑 같이 살자, 게일 데카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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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두려움은 야심차지 않은 감정이라고 했었지. 하나 두려움은 사실 야망의 뒷면이라, 게일은 항상 자신도 인정하지 않은 불안과 강박에 쫓기고 있었다. 그를 미래로 인도하는 길은 탄탄하고 쭉 뻗은 직선이었으나, 외줄 타기를 하는 듯 좁았다. 조금만 잘못 발을 디디면 미스트라의 눈을 돌리고, 자신은 영영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자신도 알았다 - 그의 신에겐 자신 말고도 수많은 쵸즌과 그에 맞먹는 수많은 연인들이 있으리란 것을. 미스트라가 그를 보는 눈빛엔 사랑보다는 흥미가, 따스함보다는 무심함이 서려있었다는 걸. 그래서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한 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쉴 수도, 만족할 수 없었다. 게일은 이걸 야망이라고 불렀다. 그 야망을 자신의 신을 향해 바치며 그게 사랑이라 믿었다. 그의 야망은 게일을 계속해서 위로 끌어올려주는 구원이자 멈출 수 없는 엔진이었다. 이게 맞는 거라고, 그래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엔진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건 무슨 의미일까. 달리기를 멈추면 나는 어떻게 될까. 온전히 나 자체로 충분할 수 있단 건 어떤 걸까. 할 수 있을까. 위로 더 계속 올라가려 발악하지 않아도, 매일같이 높아지는 기대가 없어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냥 게일 데카리오스라도 괜찮을까. 별들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게 아니라 평범한 바닷가에서 물놀이나 해도. 발바닥에 묻은 까끌한 모래의 감촉을 느끼고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옆에 있는 너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어둠 속 불가능하게 밝은 성이 아니라, 삐걱거리고 바닥이 조금은 기울어진 방 하나더라도.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이미 다 아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이라도, 너와 함께면 괜찮을까.
그럴 것 같다.
눈을 뜨니 새벽이 거의 달아나고 있었다. 막 떠오르는 해와 눈 마주치며 일어난 게일은 옆에 자신의 몸에 딱 맞게 누워있는 타브를 보았다. 그의 숨결이 자신의 입술에 와 닿으니 심장이 저릿해졌다.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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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딥의 게일, 그대는 이 세계를 위해, 마법을 위해 훌륭한 봉사를 해줬어요. 보답으로 무엇을 원하나요?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게일은 웃으며 어떤 신에게 마지막으로 말한다.
내 이름은 게일 데카리오스에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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