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게
그 한마디만 남긴 채 게일은 당황하며 자신의 손을 잡아 끄는 타브를 최대한 부드럽게 뿌리치고 발길을 돌렸다. 타브의 눈은 당혹감과 두려움을 번갈아가며 비추었다. 신기하지, 처음에 그 돌에 갇혔을 때 자신을 세상으로 이끌어준 그 따스한 두 손이, 지금은 왜 자신을 가두려는 족쇄처럼 들러붙는지.
처음에는 낮게 읊조리는, 나중에는 목청껏 자신의 이름을 울부짖는 타브를 뒤로한 채 게일은 그의 목소리에 마음 약해지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안돼. 이건 너와 나를 위한 거야. 너도 보게 될 거야, 타브. 이것이 내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 알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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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진부하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고무줄 같은 시간을 타고 게일을 왕관을 되찾고, 타브를 피해 다녔으며, 신이 되었다. 지온타를 거닐던 그 검고 깊은 시간 동안 미스트라가 오브에 건 보호막을 거두어 가 버릴까 걱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필멸자의 선택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신들의 서약인가. 아니면 그저 게일이 선택받은 자였던 순간들과 그의 권위에 한 발짝 다가가려는 순간조차 관통하는 무심함일까.
바람을 타고 들리는 소문엔 의하면 워터딥의 게일의 탑에는 귀신이 산다고 했다. 그 위저드가 떠난 지는 한참 되었는데, 그 탑은 불이 꺼지지 않고 매 밤마다 우는 소리가 들린다더라. 가끔은 하루종일 게일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항상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더라. 운이 좋으면 그 탑을 들락날락 거리는 형상을 볼 수가 있는데, 사람의 눈이 그만큼의 슬픔을 담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귀신인 게 분명하다.
게일은 매일 밤 타브를 그렸다. 그가 자신의 탑에서 자길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페이룬 전역을 다 그의 발자국으로 덮을 기세로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가까스로 타브를 피해 도망친 어느 하루, 게일은 그때 멀리서 점처럼 작아져가던 제 연인의 모습을 몇 달간 꿈에서 그렸다. 타브의 자신을 쫓는 행보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면서도 좋았다. 한 번이라도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을 갈망해 본 적이 있던가. 자신을 위해 이만큼 희생하며 앓던 사람이 있던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믿었다. 신이 되어서도 그 누구의 추종도 그의 연인의 사랑만큼 달진 않을 것이다. 내가 돌아가면 그때는 모든 걸 줄게. 너에게 세상을 주고 그걸 덮을만한 바다를 줄게. 넌 세상을 삼킬 만큼의 헌신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언제든 네가 원한다면 그럴 수 있게. 우린 서로에게 완벽할 거야.
그래서, 그 어느 늦은 밤 수만 개의 빛과 색으로 만들어진 게일이 타브의 꿈에 드디어 나타났을 때, 게일은 당연히 기대했다. 그의 연인이 그에게로 달려오기를, 그의 손에, 눈에, 입에 입 맞추기를, 선택받기를.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서 이끌려 나온 타브는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게일의 형상을 드디어 알아채고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에 희망을 닮은 무언가가 타브의 얼굴을 스쳐갔다. 진짜였는지, 게일의 기대가 투사된 것인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
"아, 미친놈아."
그 한마디만 남긴 채 타브는 그를 향해 구애하는 빛줄기들을 뿌리친 채 등을 돌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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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브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후, 적잖게 충격을 받은 게일은 바로 다시 그를 찾아가기보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다. 그는 똑똑했고, 난제를 푸는 것을 좋아했으며, 잘했다. 그리고 지금 타브는 그의 가장 큰 난제였다. 무언갈 풀려면 우선 그걸 이해해야지. 그러려면 관찰해야 하고. 존재를 숨기고 공기에 녹아들어 바람으로부터, 길가에 난 꽃으로부터, 타브가 밟는 흙바닥이 되어 그를 지켜보았다.
게일이 그의 꿈에 나타난 바로 그다음 날, 타브는 1년 동안 그의 집이 되었던 게일의 워터딥 타워를 떠났다. 짐가방은 조촐했다. 옷가지 몇 개, 어떻게 알고 챙긴 건지 게일이 한때 아꼈던 책 몇 권과 잠옷을 포함한 옷 몇 가지, 그의 흔적이 묻은 잡동사니들. 이상하리만치 타브보단 게일 자신의 물건들로 채워진 짐가방이었다. 밖으로 나갈 때 타브는 당연한 듯, 습관인 듯,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연습한 듯 타워에 불을 지르고 나갔다. 이걸로 타워의 귀신은 이제 죽은 걸까, 게일은 무심코 생각했다. 몇십 년 동안 자신의 터전이었던 공간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들지 않았다. 들었어야 하나, 잘 모르겠다.
그 후 타브는 모레나와 타라를 찾아가 차를 마시고 한동안 같이 울다가 그곳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타라도, 모레나도. 몇 년 전보단 조금 더 말랐지만 괜찮아 보였다. 나중에 그들에게도 충분한 축복을 내려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저 슬픈 표정을 거둘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행복하면 그도 행복하다 했으니, 지금도 분명 그럴 것이다. 타라도 마찬가지고. 자신은 지금 아마 행복했으니까.
낮에는 어딘가로 끊임없이 여행을 하다가 밤이 찾아오면 타브는 끊임없이 울었다. 어떨 때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어떨 때는 세상으로부터 숨어야 하는 듯 모든 걸 삼키며 울었다. 어떨 때는 신에게 기도하듯 게일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고 (그를 향한 기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떨 때는 그를 저주하며 울었다. 게일은 그 울음의 의미를 이해하진 못해 답답했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지금 원한다면 보이지 않게 타브를 통과할 수도, 눈물을 닦아 줄수도, 손을 뻗어 그의 뛰고 있는 심장을 어루만질 수도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는 열망이 채워지지 않아 한 번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으나 돌아온 건 소스라치게 놀란 타브와 침묵 속에 퍼진 현란한 욕설뿐이었다. 한때는 그토록 익숙하던 그의 손길이 언제 이렇게 낯선 존재가 되었을까.
타브의 발길은 발더스게이트에서 멈췄다. 어느 야심한 밤, 그는 공동묘지에 들어가 땅을 팠다. 그 안에 게일의 나머지 물건들을 털어놓고,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흙을 덮고, 마지막으로 흙더미 위에 무언가를 놓고 자리를 떠났다. 그 모든 것을 하는 내내 타브는 전혀 우아하지 않게 눈물이고 콧물이고 침이고 흘리며 울었다. 게일은 혀로 그 눈물을 그대로 타고 타브의 입술에 입 맞추길 원했다. 제 연인을 품에 안고 가슴속에 품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너도 알 텐데. 나도 드디어 만족할 텐데.
타브가 떠난 후, 가까이서 본 무덤 위엔 초라한 반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날 이후로 타브는 더 이상 밤에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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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브는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 - 게일은 확신했다. 내가 너무 갑작스레 나타나서 놀랬던 게 분명하다. 하긴, 일 년이나 되었는데 너무 예고도 예의도 없이 찾아가긴 했지. 천천히, 조금씩 다가가면 그도 다시 내게 익숙해질 것이다.
그래서 게일은 그다음 날 타브의 집을 성으로 바꾸어버렸다. 타브는 한동안 집안을 뒤덮은 반짝이는 고급 장식들을 보다가, 벽난로 옆 불쏘시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신경을 써서 모든 걸 부수었다. 타브가 나중에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땐 원래 그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날 밤 게일은 꿈속에서 타브를 다시 불러내었다. 이번엔 인간의 형상으로. 아무래도 그때는 등장이 좀 너무 과했지. 타브는 이번엔 어리둥절한 표정 대신 얼음이 서릴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게일을 마주쳤다. 더 이상 숨을 쉴 필요도 없으면서 게일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타브, 전에는 갑자기 그렇게 나타나서 미안해. 누군가를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내 매너를 그 사이에 다 잊어버렸나 봐. 집을 갑자기 바꾼 것도 말이야. 너무 마음이 앞섰던 것 같아. 정식으로 사과할게."
대답 없이 한동안 게일을 노려보던 타브는 또다시 그대로 떠나갔다.
타브는 침대맡에 놓여있는 라벤더 한 다발과 눈 마주치며 일어났다. 누가 보낸 건지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다발 채로 꽃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이 기이한 일방적 상호작용은 계속되었다. 게일은 타브를 꿈속에서, 물에 비친 형상으로, 어떨 때는 짧은 환영으로 계속해서 불렀고 타브는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얼굴을 구기며 그를 무시했다. 그러고 난 후 타브는 항상 근처에 라벤더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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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며 자신을 찾던 그의 연인은 왜 드디어 그 앞에 자신이 서있는데 등을 돌리는지. 네가 더 이상 날 찾아 헤매지 않게 목적지를 네 앞으로 당겨놓았는데, 왜 날 반가워하지 않는지. 드디어 우린 다시 함께 할 수 있는데, 행복하지 않아? 나는 이제 남들이 감히 못 넘보게 가치가 흘러넘치는 존재인데,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인데, 감동스럽지 않아? 나는 무엇을 더 해야 너에게 걸맞을 수 있는 존재가 될까. 너만 나를 선택한다면 우린 모든 걸 누리고 다스릴 수 있는데. 네가 원한다면 난 세상을 만들어줄 수도, 파괴할 수도, 다른 신들을 재물로 바칠 수도 있는데.
그의 가슴속에 (가슴속에, 밖에, 그를 감싸고, 휘감고, 그 자체인) 박힌 오브가 기분 나쁘게 진동했다. 슬픔? 분노? 두려움? 확신할 수 없었다. 신성을 획득한 이후로 게일은 나날이 더 날카로워져 가는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감정은 멀리서 점멸하는 촛불처럼 가끔 알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건 아마도 허기라고 게일은 생각했다. 카사이트 위브는 이제 그의 명령을 따르는데도 때때로 자신이 죽어갈 때처럼 무언가를 갈구하고 고통스럽게 허기졌다. 타브가 그로부터 등을 돌린 뒤로 더 그러했다. 하루하루 그에겐 새로운 신도들이 생겼다. 그들의 순종과 숭배는 예전에 자신을 살렸던 아티팩트들처럼 잠깐의 갈증은 해소시켰지만 해결한 것은 아니라, 무엇을 해도 충족되지 않았다.
타브. 게일은 타브가 필요했다. 게일은 타브를 사랑했다.
이건 다 오해일 뿐이라고 게일은 생각했다. 타브는 아직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뭘 해 줄 수 있는지 못 봐서 그럴 것이다. 내 모든 걸 보면 그도 이해하고 다시 사랑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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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브, 이게 내가 일 년 동안 떠난 것에 대한 거라면, 내가 정말 진심으로 사과할게. 난 그저 -"
(타브는 침대 위에 흩뿌려져 있는 라벤더 더미를 모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안녕 타브, 여기 경치가 꽤 좋지? 너를 위해..."
(집 안 꽃병마다 라벤더가 꽂혀있다. 이 집에는 원래 꽃병이 하나도 없다. 타브는 병 채로 꽃들을 밖에 내다 버린다.)
"타브! 그때 내가 수제 훈두르 소스에 대해 이야기한 거 기억나? 이건 그것보다도 더 -"
(침대에서부터 아래층까지 라벤더가 카펫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타브는 그것들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담은 후 벽난로 속 불 안에 던진다.)
"이건 어때 타브? 이 밑이 페이룬이야. 이건 물질계 그 자체지.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 타브의 머리 위에 라벤더 잎이 비처럼 내린다. 호기심 가득 그를 보는 사람들 사이로 타브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달린다.)
"타브, 넌 내가 뭘 할 수 있는 질 몰라. 내 손만 잡으면 신성을..."
(온 집안이 라벤더 냄새로 진동한다. 발 디딜 틈 없이 꽃으로 꽉 차 있다. 타브는 진심으로 집에 불을 지를까 생각하다 한숨을 쉬고 엘프송 여관으로 향한다.)
타브, 혹시 라벤더의 꽃말을 기억해?
(기억한다. 같이 세상을 구하던 시절, 어쩌면 1년 전, 어쩌면 천 년 전, 타브는 게일을 베개 삼아 누워 별을 세고 게일은 타브를 이불 삼아 안겨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라면 눈을 반짝이며 필멸자만이 낼 수 있는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 주었기에, 그날도 단순히 라벤더 목욕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처음보다 훨씬 더 깊은 대화가 되었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어요. 나에게 대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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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오브가 그를 거의 집어삼킨 이후, 게일은 미스트라의 잔상이라도 눈에 담기 위해 자신의 탑 안에서 발악했다.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주문들을 목이 다 쉴 정도로 외치고, 바지가 해질 때까지 바닥을 기며 기도하고, 부질없는 사랑 시를 지으며 그의 신을 불렀다. 자연재해는 감정도, 자각도 없이 무심하게 잔인하다. 신들도 그렇다. 그래서 신의 침묵은 그 어떤 폭풍보다도 압도적이고, 그 안에서 게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익사하다 헤엄치는 것을 반복했다.
그 침묵은 오브보다도 더 자신의 심장을 꿰었기에 죽지 못해 사는 것이 괴로웠다. 가끔은 자신이 조금 더 이기적이라 미련 없이 죽어버렸으면 했다. 자주 스스로를 저주했고, 가끔은 미스트라를 저주하다가 그것에 죄책감을 느껴 다시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그때만큼 게일은 스스로가 작고 보잘것없이 느껴졌을 때가 없었다. 그의 신의 침묵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 그를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 믿었다. 하나 돌이켜보면 그게 정말 사랑 때문이었는지, 그를 실망시켰다는 수치심이 자신을 헤집어 놓아서인지, 아니면 그의 무관심을 견딜 수 없었던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타브의 침묵은 무슨 의미일까. 그의 침묵이 미스트라의 것보다 아픈 건 타브를 신보다 더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그의 실망이 신의 무관심보다 더 두렵기 때문인가. 게일은 요즘 자신의 감정중 갈망과 두려움을 제외하곤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타브를 볼 때 그는 자신의 요동치는 가슴을 사랑이라 명명했다. 사랑이었다. 사랑했다.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한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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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 타브?"
타브가 눈을 떴을 때 그는 별들의 바다 위, 기분 나쁘도록 낯이 익은 보트 위에 앉아 있었다. 몇 번이고 기억 속에서 돌려 봤던 장면이다. 몇 번이고 후회했던 순간이다.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다.
"그때는 환상이었지만 지금 이건 진짜야. 드디어 너를 진실된 아스트랄 바다로 초대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영광이야. 뭐가 좋겠어, 레드, 아니면 화이트?" 그때와 같은 옷을 입고, 그때와 같은 자리에서, 그때와 같이 생긴 인간의 모습을 한 신 하나가 타브 앞에 앉아 그에게 와인 글라스를 건넸다. 타브는 그를 노려보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타브의 쏘아봄에 게일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어느샌가 레드 와인이 찬 잔을 들어 대신 마셨다.
"최근에 우리가 가슴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서 갑작스럽지만 이렇게라도 자리를 마련해 봤어. 조촐하지만 알잖아, 난 좋은 와인 다음으로 로맨스와 좋은 추억에 사족을 못 쓰는 거."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게일의 미소 사이로 숨길 수 없는 신성이, 그 빛이 새어 나온다. 타브는 그 빛을 거대한 커튼으로 덮어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이 앞의 존재가 정말로 그의 연인이라고, 자신이 알고 사랑하던 인간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부드러운 사랑보다는 언뜻 광기에 가까워 보이는 열기만이 서려있었다. 그의 눈빛 아래에서 타브는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추종자들이 공물을 바치고 기도하는 어느 신의 조각상처럼 느껴졌다. 축복을 내려주기를 원하는 눈빛. 기적을 행하기를 기대하는 눈빛. 하지만 추종자들의 눈빛엔 사랑이 없다.
"나는 초대에 응한 적이 없는데." 6개월 만에 처음 자신에게 건넨 말을, 그 목소리를 게일은 그것이 은총인 듯 눈을 감고 음미했다. 드디어 그의 신이 응답한다. 내용은 상관없다, 말의 방향만이 중요할 뿐이다.
"하, 그러면 그냥 깜짝 파티라고 생각해 줘. 얼마 전에 네 생일이었는데,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잖아?" 진실이 아니다. 타브는 그의 생일날 짜증 날 정도로 부담스러운 축복을 받은 탓에 밖에 한 발짝 내디딘 순간부터 그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자신에게 전 재산을 주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타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면서도 상관 안 하는지, 게일은 말을 이었다.
"네가 그리웠어 정말. 제발, 타브, 말해줘. 뭐가 바뀐 거야? 네 행적에 대해선 다 알아. 넌 일 년 동안 날 찾아다녔잖아. 그 시간 동안 나도 매일 너의 얼굴을 그렸어. 이젠 내가 돌아왔는데 왜 나를 거부하는 거야?" 간절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눈을 흐릿하게 뜨고 그를 바라보면 이게 그 시절 게일이라고 거의 믿을 수 있을 정도다. 타브는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 이번에도 계속 입을 닫고 있을걸 그랬나. 하지만 이미 물꼬가 트였다. 그럼 갈 때까지 가봐야지.
"게일, 나는 그때 너에게 왕관을 포기해 달라고 애원했어, 진짜로 그럴 줄 알았고. 근데 넌 결국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잖아. 내가 널 찾는 걸 알고도 날 피했지. 매 순간 너는 이미 나 말고 왕관을 택한 거라 생각하는데."
"제발, 난 널 버린 게 아니야. 말했잖아, 난 모든 걸 개선시키고 싶었다고 - 신도, 세상도, 필멸자들도. 난 지금 내가 말 한대로 하고 있어. 그리고 난 결국 네게로 돌아왔는걸." 최근에 지어진 그의 사원이, 퍼지는 신도들과 축복받은 자들이 증거라면 증거일까. 하지만 그래봤자 그 많은 신들의 이름들 속에 한 줄인데.
"돌아온 건 네가 아니라, '야망의 신'이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반응에 타브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정말로, 정말로 모르는구나.
"잘 들어, 게일," 단호하고 위험한 목소리로 타브가 말을 이었다. "네가 그 대단하고 휘황찬란한 빛에 휩싸여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내가 알던 게일 데카리오스는 나에겐 죽은 거야. 나는 이미 장례를 치르고 애도했어. 아직도 하는 중이지. 하지만 더 이상 그 무덤을 파헤치는 일은 없을 거야."
"난 여기 멀쩡히 살아있어 -"
"아니, 게일. 그때 나에게 네가 처음 건넨 말이 뭔지 기억은 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이 왜 문제인지 몰랐다. 그게 문제였다.
"'타브, 나의 선택받은 자여'" 과장된 목소리와 손짓으로 그 순간을 재연해 보이던 타브는 새된 소리로 웃었다. 전혀 즐겁지 않은 소리였다. 그는 자신의 옛 연인을 똑바로 보며 말을 토해냈다. 이젠 멈출 수 없다.
"게일, 그 순간부터 너는 내게로 와서 죽었어. 게일 데카리오스는 죽고, 그 자리엔 내가 사랑했던 필멸자의 껍데기를 쓴 흔한 신 하나가 남았지. 내가 사랑하던 사람은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투로, 그런 단어들로 나를 부르지 않아. 그는 나의 필멸성을 지우려 하지 않았겠지, 그는 그걸 사랑했으니까. 미스트라가 너에게 한 짓을 다 겪고도, 나를 너의 쵸슨으로 만들겠다고? 나를 선택하겠다고,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나는 미스트라와는 달라, 타브. 제발. 나는 너를 사랑해." 게일은 세상에서 제일 당연한 일인 듯,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타브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제 옛 연인의 손을 잡으며 간절하게 타브의 눈을 향해 올려다본다.
웃긴 일이다. 타브가 앞으로 볼 수 있는 여름은 많아봤자 몇십 번이다. 그런 작은 필멸자일 뿐인 자신 앞에서 신이 된 게일은 오히려 그가 신인 양 떠받들고, 고개를 조아리고, 그의 대답을 들으려 악을 쓴다. 점점 많아져가는 그의 신도들은 그를 야망의 신이라 부르며, 젊은 마법사들은 그의 승천에 영감을 받아 그의 축복을 위해 기도한다. 하지만 게일은 사실 야망이 아니라 헌신의 화신이라, 신이 되었음에도 그는 추종자처럼 숭배하지 않는 법을 모른다. 만약 타브가 신이었다면 그것에 중독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지나친 헌신은 회피에 지나지 않아서 추종자의 눈빛에는 사랑이 없다. 네가 인간이었을 때는 그 헌신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과 두려움과 기대와 분노와 기쁨과 만족을 보았다. 필멸자를 구성하는 모든 불완전함을 보았다. 불가사의한 존재가 된 너는 오직 야망과 갈망과 두려움만이 농축된 깔끔하고 완벽한 존재다.
"아니, 게일, 넌 날 사랑하지 않아. 신들은 사랑할 수 없거든," 자신의 심장을 토해내는 타브의 뺨 위로 아주 오랜만에 눈물이 흐른다. "너는 나를 갈망하지. 너는 나를 왕좌에 올리고, 나를 신으로 만들고, 그런 나의 인정을 위해 숭배하길 원해. 네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헌신할 존재가 필요한 거야. 왜 내 인정이 필요한지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그걸 채워줄 수 없어." 타브의 말을 듣는 게일의 눈동자에 위험한 빛이 스친다.
"나는 신이 되었어, 타브.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지? 나는 이제 결핍 따윈 없어, 드디어 모두에게, 너에게 걸맞은 존재라고. 나를 왜 아직도 마다하는 거야, 뭐를 더 하면 네가 충족이 될까?"
신이 숨어봤자다. 인간의 형상은 신성을 다 담을 수가 없어서 그의 형태가 금이가고 부서진다. 손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목소리는 사방에서 울려 타브의 머릿속으로 바로 전달된다. 게일의 오브가 터질 듯 진동하고 별들도 놀라 그 둘을 지켜본다. 타브는 행동하는 신성을 눈앞에서 보고도 그저 자신의 떠나간 연인을 애도한다. 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한다.
"너는 언제나 내게 충분했어, 게일. 넌 왜 너를 나에게서 앗아간 거야?"
그래서, 신이 되어보니 어때?
네 부서진 마음은 다 나았어?
그의 옛 연인의 말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고 슬픈 자연재해다. 단어 하나하나가 게일의 심장을 관통한다 (그는 이제 심장이 없다). 한순간에 바람 빠진 공처럼 그는 가라앉는다. 아직도 무릎을 꿇고, 축 처진 어깨를 한 그는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작고 초라하게 보여서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다. 거의 사랑할 수 있는 존재다.
고작 필멸자인 내가 감히 신인 너에게 실망하는 게 뭐라고 너는 내 눈빛 아래에서 그렇게 벌벌 떠는지. 그렇게 무서워할 거라면 왜 애초에 나를 떠나 죽었나. 왜 그리움조차 머물지 못할 곳에 그렇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 나는 이 그리움을 품다 죽어버릴 건데, 너는 영원히 네 결핍이 사랑이라 믿으며 살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등을 돌리려는 타브의 손을 게일은 필사적으로 이끌어 잡는다. 그때 그 보트 위에서 타브가 간절하게 그의 손을 잡고 애원한 것보다 더 처절하다. 타브는 대답 대신 최대한 부드럽게 손을 빼내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게일의 손에 올린다. 처음 잡았던 타브의 손은 게일을 살려주었다. 그 손을 놓으면, 게일은 이제 어떻게 될까.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 손바닥 위엔 말라비틀어진 라벤더 꽃잎 몇 장만이 남아있다.
시간을 알 수 없는 별빛 바다에 불멸자 하나만이 항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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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라벤더는 꽃말이 하나 더 있지.
꽃 하나에 의미가 그렇게 많아? 또 하난 뭔데?
침묵, 이라 하더라.
카테고리 없음